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2017년은 기념할 게 많은 해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이고, 1997년 외환위기 20주년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다. 그런데 올해는 또한 몽양 여운형 서거 70주년이기도 하다. 오는 19일이 그의 기일이다. 1947년 7월19일 낮 1시께 여운형은 집 근처인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흉탄에 쓰러졌다. 근로인민당을 창당한 지 두 달 만이었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급박한 와중이었다. 암살범은 불과 19세의 소년 한지근이었고 극우 테러조직이 배후라는 이야기가 무성했지만, 전모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너무도 급작스럽고 비극적인 죽음이었기에 여운형이라는 이름은 늘 한국 현대사의 무산된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그가 김규식과 함께 앞장서 추진하던 좌우합작이 성공했다면, 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분단의 역사가 그렇게만 흘러갔을까? 통일정부 수립 실패는 정말 인력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던, 역사의 정해진 경로였던가? 한데 여운형이라는 인물에게는 이런 물음들 외에도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면모가 있다. 그것은 그가 한국 진보정치 최초의 뛰어난 대중정치가였다는 사실이다. 일제 치하 조선에는 수많은 항일혁명가들이 있었다. 해방 뒤에 그들은 여러 정당 이름으로 정치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망명혁명가, 지하혁명가의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갑자기 열린 공개 정치 무대가 익숙하지 않았다. 이것이 해방 공간이 비극으로 귀결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다만 여운형은 예외였다. 여운형 역시 본래는 망명혁명가였다. 그는 중국에서 3·1운동의 초기 기획 과정을 주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을 맡았다. 그러다 1929년 돌연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3년형을 살고 나온 뒤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국내에 남아 투쟁하는 길을 모색해야 했다. 자의에 따른 결정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여운형은 민중 곁에서 공개 활동을 하게 됐다.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3대 일간지라 불린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고, 스포츠 취미를 살려 조선체육회 회장도 맡았다. 흔히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게 <동아일보>로 알지만, 처음 이를 시도해 폐간의 비운을 당한 것은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였다. 일제가 점점 더 광기로 치닫던 1930년대에 여운형은 사회주의 성향 독립운동가로는 거의 유일하게 서울 거리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비분강개하고 함께 고뇌했다. 그런 그를 당대 민중이 어떻게 바라봤는지는 3대 일간지 사장의 세평에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일보> 방응모는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덕꺼덕,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이런 사람들의 기억이 쌓였기에 해방 후 여론조사에서 새 나라를 이끌 지도자감을 물을 때마다 항상 여운형이 첫 번째를 오르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대중정치의 생리를 체득했기에 여운형은 사회 변화의 이상을 현실에 풀어나가는 태도나 방식에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궁극 목표는 분명히 하되 항상 대중의 뜻을 물어 그에 맞춰 실현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누구보다 넓게 전세계를 내다보면서도 늘 이 나라 토양에 뿌리내릴 방안을 고민했다. 사상이 뭐냐는 일본 경찰의 심문에 “러시아에 레닌주의가 있고 중국에 손문주의가 있듯이 조선에는 여운형주의로 하는 게 해방의 첩경”이라고 답한 그였다. “여운형주의”로 말하고자 한 바는 실은 “조선 대중의 주의”였을 것이다. 몽양 선생 서거 70주기를 맞아 아프게 자문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70년 전에 비해 지금의 진보 세력은 과연 얼마나 더 성숙된 “한국 대중의 주의”를 제시하고 있는가? 여운형만큼 이상과 현실, 세계와 한국, 보편성과 토착성의 긴장과 만남을 고민하고 있는가? 여운형, 조봉암 이후 아직 그만한 진보 대중정치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마치 먼 과거의 일을 기리듯 70주기를 보낼 수가 없다. 한국 진보정치가 몽양 노선을 넘어서는 대중정치를 꽃피우고 여운형을 뛰어넘는 대중정치가를 배출하기 전까지는 그가 가고 난 뒤의 한 시대는 아직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추념보다는 다짐이 필요한 7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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