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는 동시대의 위대한 종교개혁가들과 비교하면 결함이 많은 인간이었다. 토마스 뮌처처럼 민중적이지 않았고, 츠빙글리처럼 이성적이지도 않았으며, 에라스뮈스처럼 온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 루터는 불퇴전의 기백과 투지로 부패에 찌든 중세 교회를 탄핵했고 기독교 역사의 두 번째 시대를 열었다. 루터의 무기는 지칠 줄 모르고 써내려간 글이었다.
종교개혁의 기점이 된 1517년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는 발표한 지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졌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제1공적이 됐다.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루터에게 파문 경고 칙서를 내렸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문 앞에서 보란듯이 칙서를 불살랐다. 로마는 즉각 파문으로 대응했다. 루터는 교회의 탄압에 엄청난 분량의 글로 맞섰다. 목숨을 위협하는 파문의 격랑을 책으로 막아내는 꼴이었다. 1520년 한 해 동안 루터가 쓴 책은 50만부나 팔렸다. 이 책들 가운데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는 초판 4000부가 며칠 만에 동이 났고 해가 바뀌기 전에 15쇄나 찍혔다. 루터의 다작은 1523년에 346편에 이르렀다. 루터의 근거지였던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책과 더불어 인쇄의 도시가 됐다.
루터의 최고 업적은 <성서> 번역이었다. 교황청의 파문에 쫓겨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들어 단 몇 주 만에 끝낸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어 문학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라틴어 안에 갇혀 있던 ‘신의 말씀’이 시장 바닥의 살아 있는 민중어로 옮겨졌다. 루터는 죽을 때까지 해마다 평균 1800쪽을 집필했다. 루터의 글을 모은 ‘바이마르판 전집’은 120권에 이르렀다. 종교개혁은 루터의 절박한 글쓰기가 일으킨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시대의 요구에 책과 글로 응답했던 이 신학자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의 학문 풍토에도 루터의 절박함이 필요하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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