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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투명인간 / 조혜정

등록 2017-08-20 20:19수정 2017-08-20 20:31

조혜정
대중문화팀장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가 인터넷 서점 예스24 독자들이 선정한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가 됐다. 27만5천여명이 참여한 온라인 투표에서 1위를 했다는데, 책을 ‘지적으로 보이고 싶은 허영심’을 채워주는 장식품으로 사들이기만 하는 나조차도 <82년생…>을 인상 깊게 읽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사실 나도 조 작가에게 한 표 던졌다).

<82년생…>을 읽는 내내 목이 아팠다. 82년생 언저리 세대의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겪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펼쳐지는 탓에 “맞아, 나도 이런 일 있었어”라며 하도 고개를 끄덕거린 덕분이었다. 소설은 공감과 공분으로 술술 읽혔다, 이 문장을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이건 김지영씨가 1500원짜리 커피를 한 잔 사 마시다 ‘맘충’ 취급을 당하고는 남편한테 풀어놓은 하소연이다. 김지영씨가 억울해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결혼 안 하고 아이도 낳거나 기르지 않는 사람은 그럼,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얘긴가?

이제라도 육아 문제가 사회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사회적 고민을 시작하게 된 건 그동안 아이를 기르는 여성들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부조리한 부분을 지적하고, 연대해온 결과다. 그래서 소설의 이 문장 덕분에 비혼여성이 이 사회의 ‘투명인간’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됐다.

비혼여성이 사회적으로 호명되는 유일한 순간은 소비자일 때다. 그것도, 돈 벌어 자기한테 말고는 쓸 데가 없어 씀씀이가 큰 ‘호갱님’이어야만 기업이 그 가치를 인정하고 환영해준다. “자, 여기 세련되고 트렌디한 비혼여성을 위해 멋진 신상을 준비했습니다. 당장 지갑을 여세요!”

돈으로 ‘시민권’을 구매할 때 말고는, 비혼여성은 일상생활은 물론 제도적으로도 배제된다. 이런 식이다. 얼마 전 전세자금대출을 상담하러 은행에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금리가 높다고 했더니 은행 직원이 이렇게 답했다. “대출금리 낮추고 싶으시면 결혼을 하세요. 0.5%포인트 깎아드려요.” 이자를 더 내는 것도 바가지 쓰는 것 같아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이자 덜 내자고 결혼을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정부 정책이 결혼한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 중심이어서 문제라는 지적은 이미 수없이 나왔지만, 이렇게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네 집 건너 한 집이 1인가구라는 지금까지도. 물론 1인가구가 겪는 부당함은 성별을 가리지 않지만, 비혼여성에겐 성차별이라는 ‘기본 옵션’이 있다. 모든 여성이 당하는 성차별에 1인가구의 고단함이 더해져 비혼여성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답답한 점은, 육아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연대할 수 있는 여성들과 달리 비혼여성은 각기 다른 세계에 편재하는 개별적 존재들이어서 공동의 이해관계가 없다는 거다. 이런 걸 고치자, 저런 걸 바꾸자, 함께 요구할 사안이 별로 없다. 제도적·일상적 차별은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한다.

그러니 나 혼자라도 외쳐봐야겠다. 오늘도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 이건가 도리질하며 꾸역꾸역 출근해 소처럼 일하고, 오만 가지 차별과 폭력을 당하면서도 제 삶을 책임지려 발버둥 치는 이 땅의 비혼여성들 모두, 파이팅.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 힘을 짜내 발을 내딛지 않으면 끝낼 수 없는 등산처럼 혼자 꿋꿋이 걸어온 비혼여성들 모두, 파이팅.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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