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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이사와 이산 / 이라영

등록 2017-08-23 19:20수정 2017-08-24 11:45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얼마 전 조카가 이사를 경험했다. 아직 이사에 대한 개념이 없는 조카는 매일 “여기는 집이 아니야. 집에 갈 거야”라고 하며 예전 살던 동네 이름을 읊어댄다. 어린아이는 ‘집에 돌아가지 못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고작 30개월짜리 아이의 그리움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어른들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나도 인구 5만이 안 되는, 90% 가까이 백인으로 구성된 미국의 한 작은 마을로 이사를 했다. 실직과 이혼에 비견될 정도로 일상에서 커다란 스트레스를 준다는 이사. 삶의 흔적을 떠안고 옮기는 일은 행정적, 물리적, 감정적인 일처리를 가득 쏟아놓는다. 지금까지 나는 스물서너번 정도 이삿짐을 싸고 풀었다. 십대, 이십대에 그렸던 나의 많은 그림들은 수많은 이사 과정에서 파손, 유실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삶의 장소를 자주 바꾸는 사람에게 물질적 보관이란 사치였다. 대신 장소, 그 자체와 관계 맺는 일은 자연스럽게 피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한국-프랑스-미국으로 옮겨다니는 과정 속에서 이사가 이산의 경험을 낳았고, 내 일상은 ‘틈’으로 채워졌다. 말과 말 사이, 피부색 사이, 지역과 지역 사이에서 발생하는 그 틈이 바로 인간에게 사유의 영역이다. 가수 이효리가 서울을 떠나 제주에 살면서 발표한 신곡 ‘서울’도 이러한 사유 속에서 자연스럽게 창작된 곡으로 보인다. 이주는 제 주변을 구성하는 인간관계와 환경, 기후, 음식, 때에 따라 언어까지 바뀌는 일상의 지각 대변동을 몰고 온다. 상실로 채워지는 이주는 한편 개인의 정체성을 꾸준히 되묻는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고정불변적이지 않다. 스튜어트 홀의 주장대로 특정한 역사, 곧 장소와 시대 속에서 ‘자리매김’되어 형성된다.

특히 여성에게 이주는 인종과 젠더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의 무게를 가중시킨다. 나의 젠더와 국적(과 인종)에 대해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환경은 나의 ‘기원’에 나를 꾸준히 묶으려 한다. ‘~로부터’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흩어진 삶의 흔적처럼 언어는 흩어지고, 수많은 통번역 속에서 결국 말은 온전히 번역되지 못함을 알아간다. 프랑스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한 친구는 매일 아침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를 베껴 쓰고 전시회에서 이를 낭독한 적이 있다. 적응과 이해를 위한 첫걸음은 반복과 모방이다. 차학경의 소설 <딕테>의 산만함을 나는 비로소 ‘이해’한다. 일상의 ‘받아쓰기’를 통과한 후 만들어지는 나의 언어가 “속에서 들끓는다. 상처, 액체, 먼지, 터뜨려야 한다. 배설해야 한다.” 예전에는 ‘전위적인’, ‘포스트 식민주의’ 등으로 설명되는 이론적 차원에서 냉정하게 바라보았다면, 지금 나는 감정적 동요를 끌어안고 말과 말 사이를 오간다.

얼마 전 미국의 샬러츠빌 테러에서 울려퍼진 ‘화이트 라이브스 매터’. ‘백인의 생명은 중요하다’고 외치는 목소리는 수많은 정체성의 틈을 사유하지 않고, 이 틈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인종’은 생물학적 개념이라기보다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발명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종주의는 계층 분열을 위해 필수적이다. 대중의 분노를 체제가 아니라 타 인종에게 쏟아내도록 이끈다. 다인종 사회에서 비백인은 곧 이 장소에서 몰아내도 괜찮은 이방인이다. 상대적으로 인종 구성이 복잡하지 않은 한국 사회가 이 분노를 여성혐오로 ‘해소’하듯이. 인종과 성별로 장소의 주인이 되어 지배계급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착각은 계급의식을 분쇄하고 싶은 자본주의가 대중에게 정확히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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