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주팀장 “아버지와 형님, 나 셋이서 알뜨르에 같이 가서 함바(노동자 임시숙소를 뜻하는 일본어)에 자면서 송악산 굴 파는 작업을 했어요. 15살에 힘든 곡괭이질을 하다가 이마를 심하게 다쳤지요.” 10여년 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경험자들을 취재하다 만난 고 김성방(당시 77·제주시 한림읍)씨는 노무동원됐던 경험을 이렇게 풀어낸 적이 있다. 이마에는 흉터가 있었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송악산 주변 ‘알뜨르’는 ‘아래쪽’이라는 뜻의 ‘알’과 ‘들’이라는 뜻의 ‘드르’라는 제주어가 합쳐진 지명이다. 해안에 인접한 넓은 농경지인 이곳은 일제의 침략전쟁 야욕을 보여주는 전쟁유적이 잘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일제는 이곳을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 때 중국 폭격을 위한 비행기지로 이용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국의 일본 본토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비행장을 비롯한 각종 군사시설을 구축했다. 이런 과정에서 제주도민은 비행장 건설, 갱도진지·벙커 구축 작업 등 전쟁 준비에 상시 강제동원됐다. 김씨처럼 가족이 함께 동원되기도 했고, 농사일해야 하는 아버지 대신 어린 나이에 동원되는 ‘대리 동원’도 있었다. 삼형제가 일본과 제주도의 노동 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져 징병과 징용을 간 경우도 있다. 공사 중 비행기 격납고에서 떨어지거나 갱도진지를 파다가 천장이 무너져 다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알뜨르비행장 확장 공사를 했지. 농번기에는 50여명이 가서 살면서 일하면 일주일 뒤에는 교대로 그 인원만큼 또 들어가야 해. 한 3년 동안 계속 일을 했는데 삽과 곡괭이로만 하니 다 끝내지 못했어.” 17살 때부터 3년 동안 알뜨르비행장에 동원됐던 서귀포시 대정읍 문상진(92)씨는 1945년 4월 미군과 일본군의 오키나와전투가 벌어진 뒤에는 송악산에서 일본군과 같이 지내면서 미군이 상륙하면 전차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송악산 경사면을 깎아내는 작업에 동원됐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제주섬 전체를 작전지역으로 상정한 일제는 제주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지방 주민들까지 군사시설 구축에 내몰았다. 제주에 강제동원됐던 전남 해남군 옥매광산 광부 118명은 해방 뒤 배를 타고 귀향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배에 불이 나 수몰되기도 했다. 한라산 어승생오름에 있는 토치카(총을 쏠 수 있는 구멍 등을 내놓고 콘크리트 등으로 만든 구축물) 진지는 제주도 징병자들이 만들었다.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도 예사였다. “일본군 반장한테 안 맞은 조선사람이 없어. 동료들이 조선말 쓰는 게 들리면 덮어놓고 때려. 밤에 막사에서 자고 있으면 아무라도 불러내. 첫 번에 대답하지 않으면 정신 태만이라며 뺨을 때리고, 곧바로 대답하면 도망가려고 한다며 때려. 작업화를 양손에 잡고 뺨을 때리면 낮에는 얼굴이 퉁퉁 부어서 눈을 제대로 못 뜰 정도가 돼.” 일본군 징병 1기생으로 어승생오름에 동원됐던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된 제주도민은 17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도내 동원’된 인원을 합치면 강제동원된 제주도민은 수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한라산에서 해안까지 제주도는 섬 전체가 강제동원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는 조형물 하나 없다는 건 ‘평화의 섬’ 제주로선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제주도민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알뜨르에 강제동원의 기억을 되새길 기념 조형물을 세우면 어떨까. 민주노총 제주본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지난 7월 ‘제주지역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오는 10월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한다.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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