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의 장기 집권은 역사적 교착 상태의 산물이다.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현상 유지 정치가 지속되다 보니 지표면 아래에서 불만이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비극적이게도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이 불만의 대변자로 나섰다. 나치 이후 처음으로 파시스트 정당이 독일 의회에 대거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진보정치 독일 총선에서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이하 기독교민주연합)이 32.9%를 획득하며 제1당의 자리를 유지했다. 이로써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 4연임에 성공했다. 이번 총선에서 독일 국민은 한마디로 현상 유지를 택했다. 메르켈의 잇단 총선 승리는 여러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냉정한 답은 딱히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민주연합은 지난 총선에 비해 정당투표 득표율이 8.6%포인트나 떨어졌다. 그래서 의석도 65석이나 줄었다. 즉, 기독교민주연합이 승리한 게 아니다. 단지 주 경쟁자인 사회민주당이 더 처참하게 패배하는 바람에 승자가 된 것일 뿐이다.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은 20.5%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후 최악의 성적이다. 몇 달 전만 해도 사회민주당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마르틴 슐츠 전 유럽의회 의장이 총리 후보로 선출되자 당 지지율이 오랜만에 기독교민주연합을 앞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바람은 곧 잦아들었다. 애초에 슐츠가 기대를 모은 것은 그가 독일 국내 정치에서는 신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슬픈 이야기다. 대다수 사회민주당 중진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시절 추진한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에 연루됐거나 기독교민주연합과의 대연정에서 메르켈 총리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다. 그래서 사회민주당의 전통 지지층에서도 별로 신망을 얻지 못한다. 슐츠는 그런 과거와 직접 연관되지 않았다. 그래서 반짝 인기를 탔다. 그러나 그는 독일의 버니 샌더스나 제러미 코빈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이에 맞섰던 신념과 비전의 정치가가 아니다. 총리 후보가 되고 난 뒤에 점점 이런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 결과가 이번의 참패다. 게다가 사회민주당은 제1당이 될지라도 연립정부를 구성해 집권하기 힘든 처지다. 매번 선거 때마다 10% 가까이 득표하는 좌파당, 녹색당과 적-적-녹 연립정부를 결성해야 사회민주당의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제 독일 정치의 상식이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좌파당과 연정을 결성할 가능성을 닫고 있다. 좌파당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이렇게 집권 가능성이 없는 제1야당에 유권자들이 표를 몰아주길 기대할 수는 없다. 메르켈의 장기 집권은 이런 역사적 교착 상태의 산물이다.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현상 유지 정치가 지속되다 보니 지표면 아래에서 불만이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참으로 비극적이게도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이 불만의 대변자로 나섰다. 그래서 나치 이후 처음으로 파시스트 정당이 독일 의회에 대거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더 불길한 것은 ‘독일을 위한 대안’이 기독교민주연합 실망층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이나 좌파당을 지지하던 노동계급으로부터도 지지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빼앗아갈까 걱정하는 불안정 노동자들과 옛 동독 지역 주민들이 이번 총선에서 대거 ‘독일을 위한 대안’에 표를 던졌다. 과거에 나치도 경제 위기와 실업 공포의 덕을 보았다지만,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지지 기반이 중간계급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때는 그만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확고히 조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 좋지 않다. 사회민주당의 마비 상태가 계속될수록 눈길이 그 왼쪽의 좌파당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좌파당도 성적이 시원치 않다. 지난 총선에 비해 득표율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0.5%포인트 상승한 9.2%), 지지 순위는 오히려 극우파 ‘독일을 위한 대안’과 신자유주의적인 자유민주당에 밀렸다. 당 지지층 바깥에서도 신뢰를 얻고 있는 자라 바겐크네히트 의원이 스페인의 포데모스처럼 급진좌파 노선을 대중정치와 결합하려고 노력했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랬다.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자.” 이것은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숙원 중 하나다. 흔히 거론되는 모범은 독일 사회민주당이다. 그러나 현재 독일 정당정치 지형은 ‘100년 가는 정당’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게 ‘지금 이곳에 필요한 정당’이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단지 좌파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이념을 강조하는 정당이 아니라 역사의 교착 상태를 뚫는 힘과 계기를 실제로 만들어내는 정당 말이다. 그런 정당만이 탈신자유주의의 어두컴컴한 터널 속에서 진정 ‘진보’정당일 수 있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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