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경복궁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한 것은 중국 주나라 종법(제사 권한·절차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 주나라 신도시 낙읍의 서쪽엔 주나라 사람들이 살아 농사의 신으로 추앙받던 시조 후직 등 이들 조상의 묘당이, 은나라와 상나라 유민들이 살던 동쪽엔 이들의 선조 묘당이 각각 나뉘어 있었다. 주나라 이래 황족이 지켜오던 종법이 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자들에 의해 사대부의 예법으로 정립됐고 이것이 몇세기 뒤 바다 건너 조선에서 꽃을 피운 셈이다.
유가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에는 대부는 조상 3대, 사(선비)는 1대에 한해 제사를 올리는 게 예법으로 돼 있었다. 송나라 때 주희의 <주자가례>에 이르러 사대부 모두 지위에 관계없이 조상 4대까지 제사를 올릴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에선 애초 고려 때까지 제사와 상속에 외손들도 동등하게 참여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며 <주자가례>의 예법을 도입해 제사와 상속에서 남자 중심, 장자승계를 원칙으로 세웠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친 17세기 중반 이후엔 사대부 실권이 왕권 못잖게 강해지면서 가문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제사에서 여자들 권리가 줄고 적장자 우선의 원칙이 강조되는 등 ‘가문 이기주의’ 경향이 뚜렷해졌다. 사대부 집 대종가에 가묘가 설치되고 주자가례에도 없는, 명절에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법까지 만들었다. 가문의 이익을 국가·사회 이익보다 우선하는 철저한 가부장 사회로 바뀌었다. (이상 장인용의 <주나라와 조선> 참조)
그동안 제사상 차림의 기본원칙으로 여겨온 어동육서,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의 차림법이 예서나 주자가례는 물론 우리 성리학과 제사법의 교과서 격인 율곡의 <격몽요결>에도 없는 뿌리 없는 용어라고 한다. 가족·친지와 제사 올리고 정을 나누면서 ‘가문’ 너머도 함께 생각해 보는 한가위 되기를.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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