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나서 인류는 그 누구도 비인간화 내지 악마화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만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구미권이나 일본 내지 한국의 보수 언론들의 대북 보도를 보다 보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인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진행 중인 북한과 북한인에 대한 악마화는 결국 평양이나 원산의 민간인을 대량 살상할 폭탄을 하등의 가책 없이 떨어뜨릴 잠재적 전범들을 키우고 있다. 한 사회를,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적 지도자를 따르는 세뇌된 좀비들의 무리로 그린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범죄적이다.
며칠 전 나는 아들의 학급을 인솔하고 아우슈비츠를 견학했다. 아들의 학교에서 실시하는 홀로코스트 교육의 일환으로 아우슈비츠를 찾은 것이다. 가스실이나 피해자들의 잘린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방직물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말로 묘사하기조차 어렵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인류에 속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극악무도할 수 있다면 과연 이 지구가 인간의 존재를 언제까지 참아줄 수 있을까 싶었다. 피해자들의 마지막 순간들을 상상하기만 하면 지금 여기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는 것부터 죄스럽게 느껴졌다.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지만, 내 아들의 급우들에게도 전쟁과 학살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체험하게 하는 드문 기회였다. 국내 아이들도 평화, 반전, 비폭력 교육 차원에서 방학을 맞아 대구 가창골처럼 ‘국부 이승만’의 하수인들이 보도연맹학살이라는 한국 사상 최악의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던 현장을 찾아 비명에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국가폭력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들여다볼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우슈비츠의 한 팻말에 쓰인 조지 산타야나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라는 명언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를 둘러봤을 때 피해자들의 고통 이외에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가해자들의 심리였다. 아우슈비츠 방문 전후에 내가 구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나치 친위대 소속 간수, 관리자들의 수기나 일기, 인터뷰 기사들을 다 읽었다. 가장 믿기지 않았던 것은, 그들 중에는 말년까지 “죄책감이 별로 없다”고 답한 이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근무 당시에는 대다수가 아예 죄책감은 물론이거니와 문제의식조차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유대인이나 ‘빨갱이’, 그리고 ‘감히 아군에 저항하는’ 폴란드인 등 ‘열등한 슬라브 민족’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아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특히 유대인 ‘전멸’은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해충에 불과한 존재들에 대한 ‘청소’였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간화, 악마화는 이렇게 결국 학살자들을 낳았던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나서 인류는 그 누구도 비인간화 내지 악마화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만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구미권이나 일본 내지 한국의 보수 언론들의 대북 보도를 보다 보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인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1~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1918~39년간) 유럽 극우파의 유대인 비인간화에 못지않은 북한인 비인간화가 미디어에서 판친다.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북한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하나의 ‘위협’으로만 묘사된다. 북한의 국민총생산은 미국 군비의 35분의 1에 불과하고, 북한이 핵을 갖는다 해도 그 보유량은 미국 핵의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북한의 핵 개발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좌우간 자기방어를 위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역학관계나 여태까지의 패턴으로 봐도, 북한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위협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할 만한 여지가 더 많다. 한데 세계 주류 언론들의 서술을 보면 북한은 당장이라도 한·미·일을 공격할 괴물로만 묘사된다. 이는 악마화가 아니고 과연 무엇인가?
전간기의 유럽 극우파들은 유대인들을 종교 내지 공산주의 ‘광신도’로 몰아세웠다. ‘광신도의 무리’인 유대인들이 유럽 문명을 위협한다는 논리였다. 오늘날 세계 언론들은 북한인을 세뇌 교육을 당한 로봇으로 묘사하곤 한다. 언론뿐인가? 몇 년 전에 스캔들을 일으킨 미국 영화 <인터뷰>에서는 북한 지도자를 지키는 군인들은 가차 없이 죽여도 되는, 생각 없는 기계로 형상화되었다. 물론 그 어떤 악마화도 비록 과장된 표현들을 쓰지만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일부 사실들을 이념적으로 주어진 프레임에 끼워맞추는 방식으로 독자나 시청자의 신뢰를 얻으려 한다. 굳이 따져보면 특히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적대가 많았던 동유럽에서는 유대인들 사이의 집단결속은 근본주의적 종교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까지는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미·일·한의 적대나 중·러의 꽤나 패권주의적 행태로부터 자기방어를 하려는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일종의 강경 좌파민족주의를 기조로 하는 철저한 이념 교육을 실시하는 것까지는 사실이다.
원칙상 그 어떤 국가적인 이념 강요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한데 과연 대한민국에는 국민의례 등 모두에게 무조건 강요되는 국가주의적 의례들은 없는가? 일본의 진보적 교사들이 지금도 히노마루, 기미가요에 대해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의 많은 학교에서는 매일의 교육과정을 성조기에 대한 충성 맹세로 시작하지 않는가? 굳이 국가적 이념 강요를 비판하자면 북한만이 아닌 전세계 각국의 이념 강요 행태를 똑같이 비판하는 게 더 정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이라는 특정 집단만을 이념에 세뇌당한 로봇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로 악마화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간화 ‘메뉴’에서 절대 빠지지 않았던 부분은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나 명망가, 유명인에 대한 개별화된 적대 선전이었다. 보통 나치들은 ‘전세계에 대한 지배를 노리는 유대인 자본가’를 비난하면서 로스차일드 등 저명한 유대인 부호를 거명하곤 했다. <시온 현자들의 기록> 등 반유대주의 고전(?)에서도 보통 유대인 사회 지도자들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서술되곤 한다. 나치즘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천은 바로 반공주의였는데, 유대계 소련 공산당 지도자나 동유럽 공산주의자들은 빠짐없이 ‘유럽의 미래를 위협하는’ 괴물로 묘사됐다. 나치들의 상상의 세계에서는 일반 유대인들은 이런 ‘거물 악한’들을 무조건 따르는 좀비 같은 비인간적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과연 북한인에 대해서 세계 주류 언론의 소비자가 갖게 될 그림은 그렇게까지 다를까?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조지 부시는 김정일을 “난쟁이”라고 불렀으며, 현직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김정은을 ‘리틀 로켓맨’(little rocket man)이라고 조롱한다. 한 주권국가의 지도자에 대해 다른 나라 지도자가 신장 등 신체적 특징을 거론하며 인종주의적 색채가 강한 명칭을 사용한 경우는 전후 세계사에서 전례조차 찾을 수 없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보수 언론들은 김정은을 ‘도발’만 일삼는 ‘악한’으로 묘사한다. 나치에게 로스차일드나 트로츠키 같은 자본주의적 혹은 공산주의적 ‘악마’들이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듯이 주류 구미권, 일본, 한국 언론에 ‘모든 북한인’은 ‘마왕 김정은’의 생각 없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물론 세습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니다. 삼성의 세습권력도 북한의 세습권력도 마찬가지다. 한데 김정은은 정말 ‘악마’일 뿐인가? 2년 전에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63%가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을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농 제도를 사실상 도입하는 등 합리적 경제정책으로 다수의 삶살이를 개선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언론들은 이런 이야기를 각종 ‘북한 도발’ 서사에 비해 얼마나 다루고 있는가?
악마화, 비인간화란 결국 제노사이드로 연결되는, 타자에 대한 최악의 접근법이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간화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범죄 중 하나를 준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같은 방법으로 지금 진행 중인 북한과 북한인에 대한 악마화는 결국 평양이나 원산의 민간인을 대량 살상할 폭탄을 하등의 가책 없이 떨어뜨릴 잠재적 전범들을 키우고 있다. 한 사회를,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적 지도자를 따르는 세뇌된 좀비들의 무리로 그린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범죄적이다. 우리가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막고자 한다면 우선 상대방이 우리와 똑같은 존엄성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부터 인정해야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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