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바람 제주 강정에 살고 있는 나는 1년 전 광화문을 가득 메운 그 인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았다. 한주 한주가 지날수록 많아지던 사람들이 광화문을 가득 채운 날, 제주시에 촛불집회를 나가면서 덩달아 감격했다.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지는 공간이 열린 것이 기뻤다. 공간이 열리자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들처럼 저마다 쏟아내던 이야기들은 어지럽기도 했지만 반가웠다. 지난 10월26일부터 2주간 문정현 신부님의 ‘온몸으로 깎는 반전평화 새김전’을 광화문 광장에서 한다고 했을 때 막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광장에 대한 나의 기억 때문이었다. 문정현 신부는 전쟁 위기를 고조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특히 빼앗긴 평택 대추리에 지어진 미군기지를 방문한다는 소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50년 사제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살아온 문정현 신부는 다시 길 위에 나섰다. 세종대왕상 옆, 미 대사관 맞은편에서 평화를 새기는 노사제와 그 옆에서 평화를 바느질했던 사람들은 매연과 소음 그리고 모욕과 조롱을 견뎌야 했다. 매일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들고나와 미국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빨갱이’, ‘쓰레기’, ‘무슨 신부가 저래’, ‘미국은 북한을 폭파하라’, ‘노 피스’(NO PEACE)를 공공연히 떠들어댔다. 군가와 애국가가 번갈아 들려오고 점잖게 영어로 말할 때는 연신 미국의 희생에 고맙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강정에서도 그랬듯 모욕은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오랜 친구다. 반갑지 않지만 견뎌야 한다. 그보다 힘들었던 것은 전쟁을 부추기는 말들이었다. 북한을 폭파하라고, 전쟁을 해야 평화가 온다는 사람들의 말에서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힘으로 평화를 만든다는 오래된 안보의 벽. 그 벽이 너무나 높고 두꺼워 어디서부터 두드려야 벽 너머의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든든하고 반가운 친구들도 찾아왔다. 평택 대추리를 함께 지키던 농부들은 평택에 트럼프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타들어간 마음으로 왔다. 손톱이 바짝 말려들어가 갈퀴가 된 농부는 노사제의 망치와 끌을 든다. 연신 한숨을 쉬며 태극기를 흔들고 북폭을 외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이내 새김질에 몰두한다. 손끝이 닳아 없어지도록 일군 땅을 미국에 빼앗긴 농부의 마음은 평화를 새긴다. 해고 노동자들, 거리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은 연장을 놓친 손으로 바느질을 한다. 한번 앉으면 말도 없이 해나간다. 거리에서 버틴 시간만큼이나 집요하고 꼼꼼한 한땀 한땀이다. 트럼프가 오던 날도 어김없이 서각(글씨 새김)을 하고 바느질을 하려 했지만 경찰에 의해 광화문 출입은 가로막혔다. 어찌어찌 세종대왕상 옆에 자리를 잡고 서각을 하자 망치와 끌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저지됐다.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가득 메운 광장에서 입이 막힌 듯 답답했다. 광장은 열렸으나, 때론 사방이 가로막힌 미로였다. 새김전을 시작한 첫날 오후, 기차를 타고 왔다는 초등학생들이 세종대왕상 옆 할아버지가 궁금했던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보더니 뭘 하고 있는지 물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너희나 나같이 약한 사람들이 많이 다치거든. 전쟁을 하지 말라고, 평화를 지키자고 말하는 거란다’ 하니 머리를 꾸벅 숙이고선 ‘저희를 위해 평화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합창을 한다.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이 고마워 같이 인사를 했다. 그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나침반 삼아 평화의 길을 멈추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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