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미래상은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다. 작금의 상황을 어떤 입장과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상된 미래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기술의 진보라는 현상에 대해서 한쪽에서는 풍요로운 사회를 꿈꾸며 희망에 부풀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 것이 바로 그 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이 두 입장이 그려내는 상(像)은 전혀 다르지만, 결국 둘 다 현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사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분법적 낙관주의나 비관주의 모두 온전한 설명력이나 실천력을 담보할 수 없다. 오히려 변증법적인 상호관계 구축을 통해 이 두 입장은 각각의 존재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의 위험성은 비관주의라고 할 만큼 냉철한 인식을 통해서만 포착될 수 있고, 이에 대한 대응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낙관주의를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주장했던 것처럼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의 결합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이론적 자세이며, 실천적 자원임에 분명하다. 한동안 헬조선을 외치며 절망의 나락에서 신음했던 한국 사회가 촛불혁명과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달라졌다. 하지만 이 변화가 사회구조의 근본적 개혁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어쩌면 현실은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는데 여기저기서 희망 섞인 전망만이 터져나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장에서 느꼈던 하나 됨의 경험이 바로 한국 사회의 낙관적 미래상을 추동하고 있으며, 이후 집권한 정권 또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에 집중함으로써 희망을 전파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이런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현실의 근원적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성마른 불평꾼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비판적 인식이 결여된 희망은 우리 눈을 잠시 가리는 허상에 불과하며, 결국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파국을 재촉할 위험성마저 있다. 특히 현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이 결여된 전망과 해결책이 얼마나 문제적일 수 있는지는 최근 한반도의 상황이 잘 보여준다. 예컨대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두고 쏟아진 긍정적 평가에서 향후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더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은 새 정부가 트럼프의 ‘미친’ 행동을 막아냈다는 것에 안도하며, 더 많은 무기를 사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킨다는 이상한 논리에 동조한다. 하긴 트럼프 대통령 식탁에 오른 음식부터 연회까지 온갖 ‘이벤트’에 홀려 장밋빛 전망만을 쏟아내는 언론과 전문가에게 한국 사회의 중장기적인 변혁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욕심일 게다. 그렇다고 단순히 냉소적 비관주의만을 쏟아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지금껏 한국 사회 변화는 무르익은 비판적 논의를 발판으로 현실적 전략과 실천적 동력이 결합되었을 때 가능했음을 기억하자는 뜻이다. 특히 한반도 위기라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강대국 사이에서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위치와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고, 한반도 비핵화는 결코 평화에 다다르기 위한 ‘현실적’ 목표일 수 없다는 냉정한 판단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비관적일수록, 어쩌면 조금이라도 ‘덜’ 비관적인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근거 없는 ‘희망’과 ‘낙관’으로 우리를 마비시키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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