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동네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옛날 어느 마을, 가난에 시달리고 외롭게 사는 이웃을 위해 십시일반 쌀과 엽전을 내서 마을금고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연말엔 백당나무 빨간 열매 세 개가 달려 있는 가지로 아름다운 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마을은 규약을 만들어 다양하게 구성된 마을대표들로 투명하고 자율적으로 운영하게 하였다. 대표 자리도 최대 4년으로 제한했다. 누구도 주인 행세를 못하게 했다. 원님의 간섭은 더욱 안 되었다. 무주공산의 미덕을 살리자는 취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강퍅한 원님이 오셨다. 그분은 이 금고가 이전 원님을 숭앙했던 동네 왼쪽 지역에 주로 사는 사람들이 똬리를 튼 곳이라 여기고 길들이기를 시작했다. 당연히 마을대표들은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불행히도 엽전을 나눠주는 일꾼이 금고의 몇 닢을 착복하는 사달이 났고 원님은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간섭이 노골화되었다. 새롭게 모신 상인 출신의 대표는 원님과의 좋은 관계만이 중요했기에 원님 밑에서 일했던 이들을 일꾼들의 우두머리로 모셔오기도 했다. 금고는 더 커졌으나, 상인들이 낸 돈은 자기들이 원하는 곳에 쓰도록 꼬리표를 달거나 원님의 치적을 쌓는 일에 고사리손으로 모은 엽전을 요구하는 일도 관행이 되어버렸다. 금고지기 대표들 중 아니라고 말할 사람도 더 이상 없었다. 무주공산의 ‘미덕’이 무주공산의 ‘비극’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마을 사람이 주인이라고 외치는 새 원님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금고를 깰 것인가, 아니면 원래의 취지대로 개혁할 것인가? 이 옛이야기가 대한민국의 소중한 사회적 자산인 ‘사랑의 열매’, 공식 명칭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해당되는 이야기라면? 사랑의 열매는 1998년 7월 출범했다. 이전까지 연말이면 사랑의 열매를 보고 국민이 기부한 돈을 정부 기금으로 편성해서 정부 마음대로 쓰던 것을 중단하고, 시민들에 의해 독립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되는 기구가 되도록 법률로 탄생시켰다. 초기에 회장은 고 강영훈 전 총리, 김성수 주교, 한승헌 변호사 같은 존경스러운 명망가들이었고 시민단체, 종교계, 언론계, 경제계, 노동계, 사회복지계 등을 고르게 대표하여 이사진이 구성되면서 빠르게 자리잡아나갔다. 1999년 첫 배분사업 총액은 약 200억원. 그러나 작년 한 해 모금 총액은 5700억원에 달할 만큼 외형으론 크게 성장했다. 실제 내막은 어떠할까? 이명박 정부 들어 좌파세력들이 있는 곳이라는 맹랑한 이야기도 흘러다니더니 다른 모금회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다가 직원의 횡령사건을 계기로 정부의 관리·감독 강화를 내걸고 그 운영과 배분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회장은 경제계 인사로, 사무총장은 정부 관료 출신이 들어섰다. 모금액의 3분의 2를 기부한 기업들은 자신들이 그 용도를 지정하는 일이 관행시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통일대박을 주장한 박근혜 정부 시절, 통일기금으로 100억원을 장기 예탁한 것이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남인순 의원 등이 지적했듯 정부 복지예산의 보조창구로 전락한 흔적도 여실하다. 초기 모금회 설립 정신에 비하면 엇나가도 너무 엇나갔다. 보수정권 9년 반 동안 적폐가 어디 민주주의 훼손에만 있었겠는가? 시민 정신을 갉아먹고 아름다운 기부 정신을 훼손하고 정권의 주력 사업에 국민 성금을 배분하도록 만든 그것 역시 적폐 아닐런가? 연말이다. 사랑의 열매로 시민들의 아름다운 기부가 빛을 발할 때이다. 국민들의 기부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곰팡이 낀 장독으론 국민의 사랑을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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