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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낙태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절박함을 국가는 아는가 / 양현아

등록 2017-11-27 17:57수정 2017-11-27 19:09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낙태(임신종결) 이슈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였다. 2012년 8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문에 대하여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여성들은 검은 옷을 입고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다. 또,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23만여명의 시민들이 낙태죄 폐지 청원을 요구했고, 11월26일 청와대는 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였다.

낙태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은 태아의 생명 존엄성을 무시하는가. 여성이야말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양육해온 첫번째 주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대부분 어머니의 보살핌에 의해 자라났다. 그럼에도, 낙태죄의 가치론에서 임부여성은 마치 태아와 적대적인 관계인 것처럼 어처구니없이 표상되어왔다. 필자가 행한 경험조사에서 어느 어머니가 한 말처럼 자신의 딸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면 “낙태할 수밖에 없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그보다도 수백배의 책임이니까.”

여성들이 낙태를 하는 것은 명백하게도 그녀가 또 하나의 생명을 키울 수 없어서이다. 그녀들이야말로 생명 양육의 막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미혼이기에, 직장과 학업이 허용하지 않기에, 가족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자기 몸 안에서 움트는 생명을 떨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이 처벌하지 않아도 낙태하는 여성들은 이미 아프다. 남성들은 자신의 성관계로 인해 직장을 떠나야 할 위험에 처해 보았는가. 남성들은 성관계와 임신으로 인해 산부인과를 들락거리며 음식과 모든 약물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며 9개월간 무거운 몸을 가누어본 적이 있는가. 남성들에게 공기와 같이 주어진 자유의 잣대로 여성의 자유를 논하지 말라.

한편, 낙태죄가 폐지되면 성도덕이 문란해지고 낙태가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낙태의 법적 허용과 낙태율 간에는 정적인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역이 참이다. 핀란드,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등 낙태 합법화 국가에서 낙태율이 낮게 나타나고, 낙태를 처벌하는 루마니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높은 낙태율이 보고된다. 이는 여성들의 낙태 결정에 법적 금지나 허용 이외에 다른 변수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 성차별이 심한 국가일수록 낙태율이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필요한 것은 평등한 성관계, 효과적인 성교육과 피임교육, 임신과 출산, 그리고 낙태에 대한 노동, 건강, 가족관계 등의 상담을 아우르는 ‘다초점 시스템’의 구축이다. 형법상 금지주의 하나만으로 낙태를 규율하는 현행 정책은 수다한 폐해를 낳는다. 특히 십대 소녀, 저소득층 여성 등의 의료 서비스 접근을 낮추어 너무 늦은 낙태, 위험한 낙태를 부추긴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 낙태가 불법이므로 낙태 이후(post-abortion) 의료적이고 사회적인 돌봄을 받지 못해서 여성의 재생산 건강이 위협받아왔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1973년)에서 “사생활의 권리(right of privacy)는 여성이 자신의 임신을 종결시킬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를 포함할 만큼 넓은 개념”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여성들의 임신종결 권리는 사생활의 권리를 넘어서 자기운명 결정권, 자기 삶의 통제권이라고 할 만큼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헌법상으로도 성관계, 임신, 출산, 양육에 이르는 재생산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명시해야 한다. 출산과 양육을 행해온 여성들을 생명 재생산의 1차적 주체로 국가가 신뢰하고 지원할 때, 이 나라의 출산율과 생명존중도 더욱 고양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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