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성추행은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위계질서 속에서 발생하는 갑질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거쳐 지금 사실상 재벌의 경제독재 시대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그 어떤 위계적 관계도 인신예속화와 폭력화를 수반하게 돼 있다.
‘미투’와 같은 방식의 운동은, 위계적 폭력과 갑질, 착취의 문화를 당장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흔들 수 있는 긍정적 의미의 ‘문화 대혁명’의 서곡이 될 수 있다. 악행을 저지르자마자 곧바로 공개가 가능한 투명사회에서는 폭력, 폭언, 추행, 사적인 착취 등은 훨씬 어렵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각종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미투’(#Metoo) 캠페인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당해온 성추행 피해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 캠페인은 성추행과 성폭력 추방의 차원에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사실 성추행의 목적은 진정한 의미의 성적 쾌감에 있지 않다. ‘관계’를 원치도 않는 피해자에게 추행을 벌이면서 ‘관계’를 강요하는 것은, 무엇보다 권력/폭력 행사를 통해서 가학적 쾌감을 얻으려는 짓거리다.
성추행범은 피해자의 자존감을 짓밟으면서 자신의 ‘힘’을 재확인하는 순간에 쾌락을 느낀다. 그 ‘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는, 바로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왕따 피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침묵을 강요하는 ‘일진’이나 성추행범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추행범의 행위가 공개적으로 고발되는 순간에 그 ‘힘’은 무의미해진다. 피해자의 침묵을 전제로 해서 추행을 벌이는 성추행범은, 만인의 시선 앞에서는 움츠러들고 만다. 성추행에 대한 사법적 처리도 필요하지만, ‘실명으로 망신 주기’(naming and shaming)야말로 성추행 퇴치의 관건 중 하나다.
성추행은 전세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어쩌면 한국에서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이야말로 불안노동자로 몰려 비정규직화의 주된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경제적 약자는 매우 쉽게 각종 추행의 표적이 된다. 아무리 정부에서 ‘양성평등정책’을 들먹여도 일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사는 현실 속에서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가면 갈수록 더 나빠진다. 세계경제포럼 ‘세계 성별차 보고서’(The Global Gender Gap Report)의 재작년 자료를 보면 한국의 성평등 순위는 145개국 가운데 115위에 머물렀다. 경제 부문에서는 아예 125위다.
경제만이 문제인가? 신자유주의가 사회를 각자도생의 정글로 만드는 상황에서 살인, 강도, 강간, 방화 등의 흉악범죄가 계속 늘어나는데, 그 피해자의 84%는 여성이다. 전체 한국인의 성폭력 피해율은 약 10%로 세계적으로 꽤나 높은 편이지만, ‘미투’ 캠페인이 문제 삼는 모든 종류의 성폭력과 성희롱 등을 종합해서 이야기한다면 한국 여성의 79.7%가 남성과의 내밀한 관계에서 물리적, 심적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에게 ‘미투’라고 하며 고발할 내용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차별·성추행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위계질서, 그리고 그 질서 속에서 발생하는 갑질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전근대적 사회관계들을 혁명을 통해 정리한 적이 없는,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거쳐 지금 사실상 재벌의 경제독재 시대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그 어떤 위계적 관계도 인신예속화와 폭력화를 수반하게 돼 있다. 직장 상사와 부하라든가 대학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는 법적으로 따지면 그저 의미와 권리로 이루어진 계약관계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데 한국에서는 일터든 배움터든 그 궁극적인 모델은 폭행과 폭언이 난무하는 군부대다. 그래서 ‘밑엣사람’이 된 이상 법적 의무와 권리를 따질 것도 없이 그 어떤 지시도 따라야 되고 그 어떤 폭력도 참아야 한다. 한국 직장사회 내에서의 극단적 폭력화의 실상을, 최근에 터진 부산대병원 전공의 구타 피해 사건은 잘 보여준다. 고막이 찢어지고 피멍이 들 정도로 교수한테 맞아온 전공의들은,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해 교수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청원서를 내야 했다고 한다. 그런 청원서를 내지 않으면, 어떤 면에서 폭력조직을 방불케 하는 동업자 카르텔 속에서 앞으로의 운명이 비참할 것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밑엣사람’이 사실상의 예속관계에 놓여 있어 그 어떤 폭력도 감수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법보다는 폭력을 허용하는 ‘의리’ 관계가 우선한다. 남성들도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밥벌이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여성이 직면하게 되는 부담과 위험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욕과 폭력의 도가니로부터의 출구는 있는가?
‘미투’와 같은 방식의 운동은, 위계적 폭력과 갑질, 착취의 문화를 당장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흔들 수 있는 긍정적 의미의 ‘문화 대혁명’의 서곡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홍위병 조직이나 인민재판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피해자 각자가 자신의 피해 경험을 그저 에스엔에스든 학교 대자보든 신문지상이든 그 어떤 방식으로라도 공개하는 것이다. 가해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말이다. 이 피해라는 것은 꼭 간호사들에게 강제로 야한 춤을 연습시키거나, “직장 일이 급하다”며 20~30시간 동안 집에 보내지 않고 일을 시키거나, 근무시간에 화장실 이용 횟수를 제한하는, 최근 밝혀져 공분을 산 악질적인 사례들은 아닐 수도 있다.
엄연히 성인인 대학원생이나 직장 동료에게 반말을 해대거나 회식 자리에서 강제로 술을 따르게 하거나 노래방에서 잠깐이라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신체접촉을 하는 것도 갑질의 개념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악행은 법적으로 처벌하기는 힘들어도 피해사례 공개와 가해자 실명 공개는 잠재적 가해자들에게 더 이상 이런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경계심은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악행을 저지르자마자 곧바로 공개가 가능한 투명사회에서는 폭력, 폭언, 추행, 사적인 착취 등은 훨씬 어렵다. 이와 같은 공개를 하는 경우 가해자가 명예훼손 소송 등을 무기 삼아 피해자를 괴롭힐 수 있지만, ‘미투’ 캠페인처럼 수만, 수십만 명이 동시에 그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면 아무리 사법절차를 악용하더라도 그 입을 다물게 하기는 힘들 것이다.
요즘 시대를 ‘헬조선 탈출 시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경우에 주저 없이 ‘탈출’을 선택한다. 지난해만 해도 3만6천명가량이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 같은 해에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의 수는 그것보다 3배나 적다. 한국 국적 포기자의 수는 경향적으로 늘어나지만, 한국 국적 취득자의 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국내인에게도 외국인에게도 한국은 더 이상 희망적인 삶의 터전이 못 된다는 이야기다. 이는 꼭 경제적 요인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통계를 따져보면 한국의 평균임금은 이미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수준에 가깝다. 미국이나 일본, 대부분의 서구 나라들보다야 여전히 낮지만, 외국에 가서 받게 될 차별이라든가 적응 과정의 불편 등을 생각하면 오로지 경제적 이유로만 쉽게 ‘탈출’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한국 출신의 이민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가장 흔히 거론되는 이민의 이유는 바로 초(超)경쟁적이며 엄청난 재력을 요구하는 자녀교육과, 직장에서 쌓인 피로 누적이다. 장시간 노동에다가 폭력적인 직장 분위기는, 특히 이미 민주주의와 인권을 당연한 당위로 아는, 민주화 이후에 자란 세대에게는 정말로 참아내기가 힘들다.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한국은 앞으로도 자국민에게도 외국인에게도 되도록이면 피해야 할 기피국가일 것이다.
한국에 가면 가장 자주 듣는 단어들 중에 ‘억울함’과 ‘화병’이 꼭 등장한다. 여러 갑질, 추행, 모욕을 경험해 본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억울한 트라우마적 기억이 있고, 그걸 억누르면서 살다 보니 화병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미투’ 캠페인 같은 피해사례 고백 운동은 매우 많은 이들에게 치유가 되고 해방의 행복감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연대해서 가해자들의 실명과 악행을 밝히는 순간, 그 내면 속에 도사리는 공포의 성채가 무너진다. 각자의 치유와 모두의 해방은, 바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 순간에 시작된다. ‘문화 대혁명’은 한국을 살 만한 나라로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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