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우 전 청와대민정수석비서관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직권남용 혐의에 관한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대학 4학년, 남들이 독재에 저항할 때 사시 합격한 동기생들을 모아 신군부 실세 수도방위사령관을 찾아가 안면을 텄다니 처세술부터 남달랐던 모양이다. 약관의 나이에 소년등과한 것은 같은 특수통 검사인 안대희를 닮았다. 저질무연탄 비리를 파헤쳤다가 해외연수를 떠나야 했던 안 검사처럼 그 역시 3년차 검사 시절 지역 유지의 비리 사건을 손댔다가 좌천 인사를 경험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검사’로 이름 날린 안대희와 달리 ‘노무현 수사’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평생의 주홍글씨로 남았다.
그가 누구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권력 지향의 면모는 ‘법비’ 김기춘을 닮았다. ‘박근혜 청와대’에서 비서실장 김기춘은 검찰을 확실히 장악한 그를 총애했다. 민정수석이 되자 검사 시절 자신을 누가 어떻게 평가했는지 인사자료까지 확인해가며, 원없이 인사권을 휘둘렀다고 한다. 검사장도 못한 그가 자기 ‘사단’까지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인사에 약한 검사들 생리를 파고든 덕분이었으리라. ‘법꾸라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간 구속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때가 묻었다면 그쪽도 묻지 않았겠느냐”며 당시 검찰 수뇌부를 압박한 때문이라는 미확인 소문도 있었다. 진위와 관계없이 그가 검찰에 그만큼 짙은 그늘을 드리웠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해 10월 탄핵 국면에서 안종범 당시 정책조정수석 등은 “최순실의 존재를 인정하자”고 건의했으나, 민정수석실은 “최순실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문건을 작성해 올렸다고 한다. 자신의 진퇴 문제로 민심이 악화하는 동안에도 막판까지 사퇴를 거부하며 정면돌파를 고수했던 그다. 정치적 수습 기회마저 놓쳐 다른 참모들과 함께 주군의 몰락을 자초했으니 충신보다 간신에 가깝다.
‘법비’의 권력을 꿈꿨으나 ‘법꾸라지’ 손가락질 속에 결국 ‘우병우’는 오명으로 남게 됐다.
김이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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