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홍준표 대표님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습니다. 이참에 정당 가입연령 제한 폐지하고 저와 동지 합시다!” 만 15살 김윤송은 정당 가입 원서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 자유한국당사 앞에서다. 이날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청소년들은 정당활동의 자유를 봉쇄하는 연령 제한 규정을 없애라며 각 당사를 돌면서 입당원서를 제출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의 원서는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너희에겐 표가 없잖아. 촛불이네 뭐네 하는 걸 보니 자유한국당을 지지할 것 같지도 않네.’ 이런 계산이 모욕을 허락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역사는 일부의 특권이었던 참정권을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생래적 기본권으로 전환시켜온 역사였다. 신분, 재산, 성별, 장애와 같은 장벽들이 차례로 허물어졌다. 우리처럼 독재정권을 경험한 나라는 또 다르다. 영화 <1987>이 보여주듯, 헌법 수호란 명분으로 시민의 참정권을 찬탈했던 박정희와 전두환의 ‘체육관 선거’ 시대는 불과 30년 전에야 끝이 났다. 지난 촛불은 최소한의 민주정을 복원했지만,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완이다. 대표적으로 18살 이하 청소년은 박근혜를 끌어내린 탄핵에 함께했음에도 지난 대통령선거에도, 올 6월 지방선거와 개헌 투표에도 ‘입장(入場) 불가’다. 인구의 20%가량, 9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표는 물론 주민발의, 정당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간다. 정치가 시민의 자리에서 밀어낸 이들이 다른 곳에서 제 대접을 받을 리 없다. “일 시킬 때만 우리를 학교의 주인이라 부른다.” 학칙 결정권이 없는 청소년들은 억압적 규율 아래 겨울철 패딩 하나 맘대로 걸치지 못한다. 반면, 정치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18살을 넘어 17살, 16살로 선거연령을 내리고 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연령을 달리 두지도, 정당활동 연령을 법률로 제한하지도 않는다. 청소년의회가 제안한 법률안을 국회에서 필히 심의토록 하고, 초등학생부터 학교운영위원으로 참여하는 나라도 있다. 청소년의 처지에서 한국의 참정권은 일종의 ‘신분제’나 다름없다. 최우선 과제는 선거권 획득이다. 6월 지방선거를 청소년이 참여하는 첫번째 선거로 만들라는 함성이 커지고 있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만만찮다. 최대 걸림돌은 자유한국당이다. 청소년의 미성숙과 교육의 가치 중립을 읊어대지만, 청소년 유권자의 등장이 자기네한테 불리하다는 표 계산이 핵심이다. 불행히도 이들의 명분은 통념의 지지를 받는다. ‘선동당하기 딱 좋다’ ‘어른들이 대변해주는데 왜 필요하냐’ ‘애들이 가수, 게임, 미용에나 관심 있지’. 참정권을 요구했던 여성, 흑인, 노동자도 비슷한 논리로 모욕당했음을 기억하자. 참정권은 인권이지 자격증이 아니다. 몇살부터 가능하냐고 묻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확대할 수 있을지를 찾아야 한다. 참정권은 사회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과정이 시민의 탄생을 돕는다. 정치적 배제가 무관심을 낳고 ‘입장(立場) 없음’을 강요한다. 참정권이 생긴다고 청소년의 삶이 곧장 나아질 리는 없다. 적어도 청소년이 자기 운명을 개척할 사회적 힘은 커진다. 청소년 인권에 침묵하는 법과 공약을 바꾸고 차별을 부추기는 보수 후보를 심판할 수 있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가는 게 아니라, 학교가 곧 사회이고 정치적 자리임을 익힐 수 있다. 유권자 명부 작성에 필요한 기간을 생각하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와 국회는 지금부터라도 선거연령 하향을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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