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세상이 변했다. 단순히 정권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혹자는 새로운 시대정신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적폐청산이라는 촛불정신에서 그 성격을 짐작해보기도 한다. 사실 지난겨울 촛불의 힘에 감격했던 사람들조차도 광장을 메웠던 이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금 예전의 한국 사회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적당한 수준에서 몇몇을 처벌하고 ‘화해’와 ‘사회통합’이라는 이름으로 과거 세력과 다시금 결탁하고, 점점 더 세련되어만 가는 정치공학에 따라 자신들의 입장을 뭉뚱그리며 그렇게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말이다. 사실 1987년에도 그랬다. 그 가녀린 젊은이들의 목숨값으로 얻어낸 선거권으로 광장에 모였던 민중은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를 선택했고, 그다음은 3당 야합의 김영삼이었다. 그나마 민주적이라고 믿었던 정권들 또한 권력 유지에 급급해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 앞에 무능력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진보를 믿었던 수많은 이들은 패배주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우리 대부분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부패한 기업인 이명박과 유신의 상징인 박근혜를 차례로 선택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이 촛불혁명의 끝 또한 비슷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화난 민중은 곧 보수화될 것이며, 정권교체에 담아낸 열망은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버려야만 하는 것이 된다. 원칙을 지켜내려는 것은 ‘아마추어’이며, ‘프로페셔널’한 국정운영은 적절한 타협이라는 충고가 진보적 지식인과 전문가의 입을 통해 확산된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구체제는 그렇게 다시 연장되고, 광장에 모인 민중은 또다시 좌절하는 그 역사가 반복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지금껏 통용되어온 개념과 분석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운’이 한국 사회에 가득하다. 관습과 절차, 권력과 지위로 상징되는 모든 것이 작동하지 않는다. 언론권력과 과거 정치세력을 위시한 구체제가 아무리 겁박해도 별 소용이 없다. 중국에서 당했다던 ‘굴욕’에도, 한-미 동맹 균열이라며 떠들어대는 ‘호들갑’에도, 경제적 손실을 들먹이는 ‘경제위기론’에도 민중은 꿈쩍들썩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은 둘러싸인 강대국 사이에서 ‘거래’를 하든, ‘애걸’을 하든, 무릎을 꿇든 어떻게든 평화를 만들어내라 주문하며, 당장의 손익계산보다는 좀 더 중장기적인 비전으로 남북관계의 재정립을 요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 9일 열린 남북회담을 둘러싸고 보수언론이 아무리 회담의 ‘격’을 두고 딴죽을 걸어도, ‘비핵화’라는 원칙을 들먹이며 회담 결과에 생채기를 내도, 그리고 북한의 평화 ‘공세’에 당했다 해도 대부분의 시민들은 무조건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빨갱이’만 운운하면 뭐든 전선이 만들어졌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지난겨울의 광장을 만들었던 이들의 열망은 현실 정치와 작금의 언어 밖으로 넘쳐 나간다. 어쩌면 이번 정부의 가장 두려운 상대는 과거 세력이 아니라, 이렇듯 전혀 다른 세상을 주문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일 것이다. 기존의 체계와 언어로 적당히 쫓아가서는 결코 그들의 요구에 다다를 수 없다. 겉모습과 이벤트로만 ‘다르게’ 행동하는 것 또한 금방 들켜버리고 말 것이다. 적폐라면 자신의 몸이라도 잘라낼 수 있는 단호함이 요구된다. 아주 작은 머뭇거림도 깨어 있는 이들은 놓치지 않는다. 두려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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