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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신준 칼럼] 미투에 비치는 굴뚝농성의 그림자

등록 2018-02-18 18:45수정 2018-02-18 19:10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검사·판사·변호사를 아우르는 법조인 노조, 모든 작가가 참여하는 작가노조, 모든 문화인·언론인·연구자를 포괄하는 문화·언론·연구노조가 있었다면 애초에 미투가 필요했을까?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바람이 우리나라에서도 자못 거세게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둘은 서로 닮은 듯하면서 다르다. 먼저 닮은 점은 이렇다. 대상이 성범죄이고 처벌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처벌의 전제가 되는 당사자의 고발이 권력의 위계관계에 가로막혀 있다. 이 위계관계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가 문제인데 두 곳 모두 개인의 용기에 의존해 있다. 그래서 여론도 고발자의 용기에 대한 지지와 진상조사에 의한 가해자 처벌로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바람은 여기에서 멈춘 듯하다. 이어지는 고발과 지지 그리고 처벌에서 더 나아갈 기미가 없어 보인다. 미국다운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벤트만 있고 지속가능한 해법은 없다. 그래서 똑같은 모순과 이벤트가 반복된다. 메이데이, 점령하라 운동, 샌더스 돌풍 모두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당장 발화점이 검찰이라는 점 때문이다. 검찰은 미국의 미투 바람이 멈춘 곳, 처벌을 집행하는 최정점의 조직이다. 그래서 고발과 처벌이 모두 셀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셀프 해법에는 당연히 의문이 따른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의 경우는 이 문제의 본질적 해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고발과 처벌이라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위계관계 그 자체를 개선해야 하는 사회적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검찰 이후 문단, 학계, 항공사, 영화·연극계, 언론 등으로 미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사실이 그것을 확인해준다. 그렇다면 이 위계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일각에서 얘기하듯 조직문화 개선이나 고발센터의 설치로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위계관계가 업무수행과 인사권(검찰·언론), 작품활동과 심사권(문단·학계·문화계) 등으로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예 조직의 기능을 중단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위계관계 내부의 장치로는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 어렵다. 해법은 결국 위계관계 외부의 장치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촛불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굴뚝농성이 그 해법의 단서를 품고 있다. 촛불의 광화문광장 고공농성, 한진중공업의 크레인 농성, 현대자동차와 파인텍으로 이어진 굴뚝농성이 모두 요구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다. “노동조합 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 요구의 내용은 두 가지이고 그 속에 미투의 해법도 숨겨져 있다. 하나는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대의조직의 결성이다. 노동문제는 노동력의 매매를 둘러싼 관계로부터 비롯되고 그것은 구조적으로 한쪽이 우월한 갑의 지위에 있는 위계적인 것이다. 생계가 걸린 일자리의 주도권이 구매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 자체를 없애는 것(사회혁명)이 궁극적인 해법이겠지만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차선의 해결책은 위계관계를 외부에서 통제하는 것이다. 위계관계는 고용의 주도권을 쥔 개별 자본가와 다수 노동자 사이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해결책은 개별 자본가 바깥에 노동자들의 대의조직을 결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대의조직이 위계관계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을 갖는 것이다. 위계관계의 내재적 성격이 노동자들의 노동(업무수행·작품활동)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대의조직의 수단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중단하는 것에 있다. 파업권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하지 않으면 위계관계 그 자체가 중단되는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수사가 중단된 검찰, 작품이 없는 문단, 논문·강의·공연·보도가 없는 학계·문화계·언론계, 거기에 무슨 위계관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것이 초기업 노동조합이다. 250년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운동이 찾아낸 해법이다.

결국 “모든 길은 노동으로 통한다!” 사실 위계관계는 노동을 매개로 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기울어진 것이다. 그것은 독재이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미국의 미투가 멈춘 곳, 거기에서 우리의 미투가 나아갈 길은 굴뚝농성과 촛불이 함께 가리키는 곳, 바로 민주주의이다. 검사·판사·변호사를 아우르는 법조인 노조, 모든 작가가 참여하는 작가노조, 모든 문화인·언론인·연구자를 포괄하는 문화·언론·연구노조가 거기에 있다. 이런 노조가 있었다면 애초에 미투가 필요했을까? 그래서 이제 출발선에 선 노사정 사회적 대화의 첫번째 의제는 바로 초기업 단위에서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는 단체교섭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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