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트로이성을 뒤로 하고 광기를 드러내는 카산드라를 그린 <카산드라>(1898). 에벌린 드 모르간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왕비 헤카베 사이에서 태어난 카산드라는 미래를 내다보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아폴론 신이 예언 능력을 주면서 그를 유혹했으나 거부당하자 그의 입속에 침을 뱉어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만 앗아가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카산드라는 미래를 내다봤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트로이는 결국 참혹하게 멸망했다. 오늘날에도 카산드라의 이름은 ‘시대와 불화한 예언가’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카산드라가 여성이란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 등의 고전 희곡에서 카산드라는 대체로 사건 주변부에 머물면서 ‘주어진’ 운명 앞에서 절망과 체념, 광기를 드러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남성 신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죄로 저주를 받았고, 이 때문에 가족과 나라의 멸망에 대한 자신의 예언이 현실로 이뤄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전쟁 뒤엔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전리품’이 되었다. 아가멤논의 고향 미케네에서 그의 부인이 자신과 아가멤논을 잔인하게 살해할 것이라 예언하지만, 정해진 운명을 바꿀 힘은 여전히 없다.
동독 출신 소설가 크리스타 볼프(1929~2011)는 <카산드라>(1983)란 소설에서 카산드라를 현대적으로 또 획기적으로 재해석해냈다. 여기서 카산드라는 “내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일”이라 말하며 예언 능력을 갖기를 욕망하고, 이를 이용해 현실의 속임수를 드러내어 헛된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대와의 불화’는 어쩌다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존재를 건 선택의 결과다. 오늘날 과거(증언)를 통해 미래(예언)를 바꿔 나가려는 수많은 카산드라들의 목소리를, 부디 두 귀 바짝 세우고 들으라.
최원형 책지성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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