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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나쁜 신호

등록 2018-03-15 18:31수정 2018-03-16 10:10

김어준씨는 최근 ‘미투’ 운동에 대해 끊임없이 ‘공작설’을 끼얹는 중이다. 그 여파로 ‘미투’ 고발자들은 모욕감을 느끼거나 위축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비판했고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박권일
사회비평가

과거에 ‘강간 문화’라는 말을 일상 대화에서 처음 접한 한국 남성들은 아연한 표정이 되곤 했다. 그러다 그 말이 본인과 연결되기에 이르면,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치거나 세상에 이런 억울한 경우를 처음 당해본 사람이 되어 몸을 떨며 분노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내가 강간범이란 말이야?”

이 격렬한 거부반응은 페미니스트들이 의도한 효과이기도 했을 테다. 물론 강간 문화(rape culture)라는 말이 그런 단순한 의미는 아니다. 그 말은 형법상 강간죄만이 아니라 오랜 관행과 습속까지 포괄한다.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했다. “강간 문화는 여성 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강간 문화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체로 그것은 ‘물리적 범죄로서 강간’을 지시하기보다 주로 여성을 폭력적으로 대상화하는 남성 문화 전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들도 모두 강간 문화에 해당한다. “관리 여성 명단 빨리 넘겨라 폭로하기 전에”, “여성부 관리 대상 넘겨라! 광주, 부산, 숙대, 이대 모두…”, “가슴 응원 사진 대박이다. 코피를 조심하라!” 술자리의 은밀하고 몽롱한 사담이 아니다. 정봉주씨 수감 당시 김어준, 김용민, 주진우씨는 ‘접견 민원인 서신’에 저런 이야기들을 또박또박 자필로 적은 다음 사진까지 찍어 올렸다.

당시 많은 여성들이 경악하며 김어준씨 등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김씨는 사과하지 않았다. 소위 ‘가슴 응원 사진’ 성희롱에 대해 김어준씨는 “성희롱에는 권력의 불평등 관계가 전제돼야 한다”며 “우리가 여성에게 수영복 사진을 올리라고 말할 권리가 없고, 그녀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데 그 말을 못하게 할 권력도 없으니 성희롱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어준씨 발언은 그의 젠더 문해력(gender literacy)이 얼마나 처참한 수준인지를 다시금 폭로할 뿐이다. 김씨 주장대로라면 권력 관계상 중학교 남학생이 여성 교사를 성희롱하는 일은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성희롱 사건은 실제로 빈번히 벌어졌고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남성중심-여성혐오 사회에서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권력이며 때로 감독하고 평가하는 교사 권력마저 넘어서기 때문이다.

김어준씨는 최근 ‘미투’ 운동에 대해 끊임없이 ‘공작설’을 끼얹는 중이다. 문제는 그 여파로 ‘미투’ 고발자들이 모욕감을 느끼거나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비판했고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꼼수’ 시절보다 더 큰 발언 권력이 되어 지상파 방송까지 진행하며 승승장구 중이다. 게다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하면서, 그간 의혹을 제기해온 김어준씨 등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분위기도 보인다.

한편,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사례도 있다. 그는 저서들에서 여성혐오적 표현을 거리낌없이 사용해 여성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으나, 사과만 했을 뿐 여전히 공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탁씨 사례는 직접적인 성폭력과는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요구가 탁씨의 ‘모든 사회활동 퇴출’이 아니라 ‘공직 중단’이라는 점, 그리고 잘못의 경중을 판단하는 주체가 여성-시민들이 아니라 결국 임종석씨 같은 남성-권력들이라는 점에서, 청와대의 대응은 부적절하고 오만했다.

이 모든 상황들이 강간 문화라는 문제에 있어 굉장히 나쁜 신호다. 이 상황들은 ‘착각’을 유발할 수 있다. ‘아하, 김어준 정도 발언은 괜찮구나’라는 착각, ‘사과만 하면 공직도 계속할 수 있네’라는 착각. 더 고약한 착각은 따로 있다. “‘거악과 싸워온 전사’들이니 ‘사소한’ 흠결은 눈감아줘야지.” 이것은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개혁당 성폭력 사건을 조개나 줍는 부차적인 일로 만들어버린 유시민씨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더구나 저런 착각은 ‘국가 경제에 기여했으니 재벌 회장님들 비리에 관대해도 된다’는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기 쉽다. 착각은 깨져야 하고, 나쁜 신호는 꺼져야 한다. 옳음에는 피아(彼我)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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