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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미국의 과학, 미국식 과학 / 김우재

등록 2018-04-30 18:33수정 2018-04-30 19:10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1909년 뉴욕 한복판, 컬럼비아대학의 지저분한 실험실에서 흰 눈 초파리가 태어났다. 다윈이건 멘델이건, 과학의 도그마에 겁 없이 도전하던 과학자의 실험실에서였다. 물론 그 과학자 혼자 한 일은 아니다. 뛰어난 학생이 몇몇 있었고, 스승이 관심도 없던 초파리로 노벨상까지 타게 해준 건 그들이다. 스승의 이름은 토머스 모건, 제자들의 이름은 브리지스, 스터티번트, 그리고 멀러다.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에서 현대 분자유전학의 대부분을 설계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초파리 유전학은 오래된 미국의 과학이다.

초파리 유전학의 기원은 하나다. 그래서 초파리 연구공동체는 가족처럼 움직인다. 모든 초파리 유전학자에겐 족보가 있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알기 때문에 초파리 연구공동체 안에선 나쁜 짓을 못한다. 콜러는 <파리 대왕>이라는 책에서, 초파리 연구공동체를 중심으로 ‘도덕경제’(Moral Economy)라는 문화가 과학의 스타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분석했다.

도덕경제란 두레나 품앗이처럼 공동체 내부의 자발적인 도덕적 규범과 경제 현상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고전경제학은 이기적 개인 간의 거래를 도덕이라는 개념 없이 다루지만, 우리가 아는 현실은 경제와 도덕이 뒤엉킨 난장판이기 일쑤다. 초파리 연구공동체는 호의적인 공유문화로 초협력적인 과학 문화를 이끌었다. 20세기 이후 과학이 자본주의화되어 가던 때에도, 바로 그 도덕 경제의 전통을 공유하던 과학계 리더들이 과학의 상업화를 막았다. 얼마 전 타계한 존 설스턴은 인간 유전체가 기업에 사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싸웠고, 그의 과학은 바로 초파리 유전학과 이를 이어받은 선충 유전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 전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세계 최고의 자넬리아 연구소를 이끄는 제럴드 루빈은, 초파리 책 서문에서 모건의 공유정신을 굳이 다시 꺼내 우리에게 읽어준다. 그의 자넬리아 연구소는 힘들여 만든 모든 초파리 계대를 공동체에 무료로 공유하며, 자신들의 모든 실험 방법과 결과를 즉시 공유한다. 1980년대 초파리 공동체는 ‘초파리 기지’(flybase)라는 온라인 큐레이션 도구를 만들어 모델생물 연구의 혁명시대를 열었다. 그로부터 30년, 미국과 영국 연구비에 의존하던 초파리 기지가 위기를 맞았다. 미 국립보건원이 초파리 기지 유지를 위한 연구비 인상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자본주의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과학자 대부분은 황우석이 된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미 과학계의 어떤 분야는 공유는커녕 경쟁과 승자독식을 공공연히 학생들에게 도덕으로 가르치는 지경이 된 지 오래다. 예를 들어 엄청난 연구비가 필요한 생쥐 연구나 줄기세포 연구 분야에서 공유정신이란 순진한 과학자의 철없는 꿈이다. 서로의 데이터를 숨기고, 훔치고, 빼앗고, 헐뜯는 과학자들이 그런 과학계를 이끈다. 미국식 과학이다.

그들은 과학을 승자독식의 틀에 가두고, 과학사를 영웅주의로 포장하며, 임팩트 팩터 따위의 유치한 학술지 순위를 만들고, 피라미드식으로 이루어진 학위공장에서 누군가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그리고 오피스에서 웃으며 학생들에게 과학자가 되라고 말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큰 실험실, 비싼 과학, 돈 많은 과학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 쥐 같다.

초파리 유전학이 어벤저스가 되어 그 돈에 물든 과학과 싸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과학은 미국식 과학에 의해 몰락하고 있다. 재미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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