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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역경이 재능이 되는 직업 / 김원영

등록 2018-05-21 18:36수정 2018-05-21 19:06

김원영
변호사·장애학연구자

아동기부터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직장을 잃고, 동생이 아파서 원하는 일에 집중할 시간조차 내지 못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더 큰 성취의 자원이 되는 일이 있을까?

부모의 재력과 안정된 가정환경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행정고시 합격에만 유리하지 않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현대사회 각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이유는 해당 분야에 필요한 “족집게 과외” 따위를 받아서가 아니다. 목표 달성에 필요한 근본적인 역량을 어린 시절부터 습득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정례적이고 반복적인 훈련을 견디는 자기통제력, 적절한 동기, 높은 주의력을 키울 계기가 상대적으로 많다. 먼 곳으로의 여행 경험, 티브이(TV)보다 책을 읽는 부모, 체계적인 논술과 독서 훈련, 외교관으로 일하는 가까운 친척의 존재 등.

좋은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재능까지 있다면 탁월한 외과의사, 피아니스트, 소설가, 최고경영자(CEO)가 되며 이들은 우리 사회에 기여한다. 부유하고 탁월한 법률가 집안에서 자란 우수한 법률가도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 투신한다(세상에는 우병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습된 탁월성’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문제는 투지와 열정만으로는 자기 분야에서 탁월함에 이르겠다는 꿈을 꾸기가 점점 어려운 시대라는 점이다. 고졸 출신 고시생이 역경을 돌파하며 고시에 합격하는 일은 이제 드물다. 최고의 외과의사가 되려면 과외를 4개씩 해서는 안 된다.

역경의 쓸모는 이제 사라진 걸까? 상대적으로 예외인 분야가 있다면 바로 정치다. 민주주의 정치공동체에서 직업 정치인의 제1덕목은 각 분야의 최고 전문성(탁월성)이 아니다.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행정권력(전문관료)과 경제권력(자본)을 견제하는 정치권력의 근간은, 그 정치공동체를 이루는 ‘평범한 삶’에 수반되는 욕구, 감각, 의지를 가진 조직화된 시민들이다.

시민의 참여를 끌어내고 정치권력을 조직화하는 역량에는 자기관리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처럼, 여전히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 효과적으로 길러질 자질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깊이 발을 들여놓은 ‘평균의’ 경험이야말로 민주주의적 정치인의 핵심 자질이다. 평균의 삶에는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얼마간의 역경과 결핍의 경험이 따른다. 최고 전문가가 되는 데 필요한 다른 자질을 비록 갖지 못했을지라도, 삶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역경을 묵묵히 견뎌내는 힘만큼은 ‘평균적인’ 사람들도 지지 않는다.

현재 한국 정치는 각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무대다. 청년정치인이라고 내세우는 이들조차 성공한 스타트업 대표이거나 하버드대학 출신이다. 청년의 정치적 함의는, 각 분야의 최고 탁월성에 도달할 시간을 축적하지는 않았으나 삶을 통해 얻어진 생생한 경험이 아직 기성세대의 언어로 규격화되지 않은 개인이라는 데 있다고 나는 믿는다. 역경 속에서의 실패와 결핍의 경험을 ‘제1언어’(모국어)로 삼는 청년에게 법률, 행정, 경제, 협상능력 등을 ‘제2언어’로서 가르칠 때, 이들이야말로 대중적인 감각과 일반적인 의지를 제도 정치의 언어로 번역해낼 좋은 정치인이 되지 않을까?

우리 정계에는 직업적 전문성을 모국어로 하면서 “서민의 어려움”을 외국어로 배운 어설픈 통역자들이 넘쳐난다. 곧 있을 6·13 지방선거를 넘어 더 긴 안목에서 평범한 삶의 경험과 예기치 않게 찾아온 역경을 모국어로 삼는 20대 청년정치인들을 각 정당이 길러내기를 희망한다. 평범한 배경, 결핍에 맞선 경험이 재능이 될 수 있는 그런 분야가 하나라도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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