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산흥업’이 꼭 자본주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윤추구를 ‘사리에 급급한’ 추한 일로 여겨온 유교적 기반의 동아시아 혁명가들로서는 당연히 국가화된 경제, 즉 ‘적색 개발주의’는 이념이나 ‘관리 편의’ 차원에서 훨씬 더 바람직하게 보였다.
우리가 통상 ‘공산혁명’으로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민중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압축적 근대화를 의미하는 만큼, ‘적색 개발주의’에서 국가 관료 자본주의로 갈아탄 동아시아 국가들은 매우 쉽게 자본주의 체제의 ‘용’이 된다. 북한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악수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 또 한 명의 미국 대통령과 동아시아 국가 지도자의 악수 장면이 떠올랐다. 다름이 아닌 46년 전의 마오쩌둥(모택동) 주석과 닉슨 대통령의 악수였다.
어떻게 보면 그때와 현재의 미국 사정은 엇비슷했다. 전후 호황기의 종식과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그리고 세계적으로 날로 확산되는 반전운동의 열기 등은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를 의미했다. 오늘날 중국이나 러시아, 이란 등의 지역적 패자(覇者)로서의 부상과 미국 중산층의 붕괴, 천문학적인 국가예산 적자 등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을 위협하고 있듯이 말이다. 1970년대 초반에 공화당의 노회한 정객 닉슨은 중국과의 화해와 데탕트, 베트남 전쟁의 종식 등을 통해서 미국의 재정·이미지를 개선시켜 추락해가는 미국의 위상을 다시 살려야 했다. 현재의 경우에는 같은 공화당 소속의 노회한 사업가 출신 트럼프는 신보호주의로의 회귀와 북한·러시아 등 일부 경쟁·적대 세력들과의 선별적인 관계 개선을 통해서 마찬가지로 미국 헤게모니의 쇠락을 방지하려 한다.
다른 쪽의 사정은 어떤 면에서 유사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다르기도 하다. 46년 전에 닉슨을 맞이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주은래)는 미국 제국주의를 여전히 중국을 비롯한 제3세계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한데 1969년에 중국과 며칠간의 국경전쟁을 벌인 소련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그들에게 미국보다 더 큰 위협으로 인식됐다. 중국이 반미에서 친미가 될 일이야 없었지만 미국 등 서방세력과의 관계에서 절실히 필요한 ‘실리’를 취하려 했다. 특히 대미 관계 정상화에 따를 대일 관계 정상화, 그리고 그 뒤를 이을 일본 원조·투자·기술 등이 기대됐다.
오늘날 북한도 ‘미제’를 돌연히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적 언급들은 여전히 북한 공식 매체에서 눈에 띈다. 단 ―비록 북한 매체들이 극도로 말을 아끼지만― 가까이에서 공고화돼가는 동아시아에서의 중국 패권도 북한 지도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북한만 그런 것도 아니고 북한이 ‘벤치마킹’ 대상의 하나로 보고 있는 베트남 역시 그렇다. 북한도 베트남처럼 이제 중·미 사이에서의 등거리와 실리를 추구하려 하는 셈이다. 그리고 46년 전의 중국처럼 북한도 대미 정상화에 뒤이을 대일 정상화를 통해서 새로운 경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려 한다. 단, 문화대혁명의 여열이 아직 남았던 46년 전의 중국과 달리 북한은 이미 20여년 전부터 사실상의 시장화를 시작해 오늘날 이미 반쪽 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그만큼 북한의 차후 경제개발이 더 쉽고 빠를 것이라고 예상되기도 한다.
북한의 자본주의적 개발이 생각보다 대단히 빠를 수 있는 데에 또 다른 본질적인 이유도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상적으로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와 정반대되는, 유토피아적이며 극도로 평등주의적인 것으로 상상하곤 한다. ‘공산주의’를 표방해온 중국이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계산된 국민총생산으로 이미 미국도 유럽연합도 다 추월해 자본주의 세계 전체를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중국이나 북한을 탄생케 한 혁명들은 꼭 ‘공산주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은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경자유전’(耕者有田)이나 ‘항산’(恒産), ‘민생’을 강조해온 유교사상의 영향 등으로― ‘나라에서 인민들을 챙기는’ 국가의 건설을 지향했다.
김일성은 체 게바라가 ‘낙원’이라고 평가한 나름의 ‘제3세계형 복지국가’를 1950~60년대에 북한에서 만들기도 했다. 한데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에게는 ‘인민들을 챙기는 나라’를 ‘인민’들과 상당히 다른 삶을 사는 과거의 ‘백관’(百官)들에 비견되는 간부들이 인민들의 이렇다 할 참여 기회 없이 알아서 ‘관리’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혁명은 ‘민생’ 이전에 ‘구국’, 즉 외세의 배척과 국가 주권의 확립, 그리고 근대 민족국가에 필요한 인력 배양, 생산력 향상이었다. 예컨대 중국의 대약진운동 시절(1958~62년)에 볼 수 있었듯이 이 현대판 ‘식산흥업’에 민생이 커다란 희생을 치르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식산흥업’이 꼭 자본주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윤 추구를 ‘사리(私利)에 급급한’ 추한 일로 여겨온 유교적 기반의 동아시아 혁명가들로서는 당연히 국가화된 경제, 즉 ‘적색 개발주의’는 이념이나 ‘관리 편의’ 차원에서 훨씬 더 바람직하게 보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북한에서도 이미 1970년대에 소련식 내부 자원 동원 위주의 국가화된 경제는 그 한계를 노출했다. 소련만큼 동원 가능한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거기에다가 자본과 기술이 태부족하고 대미 대립이 초래하는 군비 부담도 너무나 버거웠다.
결국 마오쩌둥과 닉슨의 46년 전 악수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중국은 1970년대 말에 이르러 국가화된 폐쇄경제 모델에서 국가 관료 주도의, 외자 동원형 자본주의 모델로 갈아탔다. 말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였지만 실은 관료 감독하의 자본주의였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엄청난 경제체제 변화가 대다수 인민과 간부들에게 먹혀들어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국가화된 경제든 통제형 자본주의든 생산력 발달이 ‘민생’에도 ‘구국’, 즉 민족국가의 주권 공고화에도 핵심적 역할을 해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한도 중국의 경험을 참고해서 1984년 외국 자본과의 합작회사 설립을 허용한 합영법 반포 이후로는 꾸준히 제한적인 개방을 추구해왔다. 2002년 7월 ‘경제 관리개선 조치’는 상품들의 시장 유통을 공식화했으며 김정은 시대에 접어들어 중국과 같은 방식의 가족농 도입으로 만성적인 식량난이 해결되었다. 한데 마오쩌둥과 달리 김일성에게도 김정일에게도 미국 대통령은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북한의 개혁개방이 여태까지 ‘반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쪽’임에도 최근 북한의 연간 성장률은 약 4% 정도로 추측된다. 중국의 경우, 197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의 평균 연간 성장률은 9~10% 정도였다. 대외적인 조건만 성립되면 혁명을 거친, 이당치국(以黨治國)을 이념으로 하는 대중적 기반 위의 일당제 국가들의 성장이 이처럼 빠른 이유는 간단하다. ‘민생’과 ‘구국’의 차원에서 중국이나 북한 같은 국가들이 교육·과학 투자를 집중적으로 해왔으며 양질의 숙련공·기술자 인력들을 양성해왔다. 거기에다가 업적주의적 방식으로 ‘우수한 일꾼’들을 간부로 발탁하는 당은 자원 배분의 합리성을 높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부문에의 집중적 투자를 유도하면서 산업 구조의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를 주도한다. 그렇게 해서 중국은 40여년 전의 방직물 수출국에서 오늘과 같은 첨단 전자제품과 금융 수출국으로 발돋움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이 북한의 개발을 더는 방해하지 않고 대북 투자와 기술이전을 허용한다면 공업 전통이 강하고 고급 인력이 풍부한 북한은 어쩌면 이 궤도를 더 빨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통상 ‘공산혁명’으로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민중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압축적 근대화를 의미하는 만큼, ‘적색 개발주의’에서 국가 관료 자본주의로 갈아탄 동아시아 국가들은 매우 쉽게 자본주의 체제의 ‘용’이 된다. 북한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단,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구국’, 즉 시장적 방식을 통한 생산력 향상의 열기 속에서 혁명 당시에 의미를 지녔던 ‘민생’의 가치들이 묻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생은 꼭 의식주의 해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 농업사회 평민 마을처럼 다수가 화목하게, 큰 격차 없이 어울려 산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북한은 오랫동안 모두가 나라에서 주거를 배분받고 아프면 병원에 가서 무상으로 치료를 받고 재능이 있으면 대학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나라였다. 아무리 ‘강성대국 건설’ 차원에서 자본화가 불가피하다 해도 이런 훌륭한 성취들이 그대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이슈한반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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