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1에디터 예민한 이슈가 불거지면 보도 내용이나 방향과 관련해 독자들이 직접 신문사에 전화를 주시곤 한다. 칭찬도 있지만, 꾸지람이 더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언론이 어떤 사안에 ‘잘했다’고 쓰기보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 비판하는 일에 더 집중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6월 한달 동안 제주에 온 예멘인을 둘러싼 난민 이슈가 이어졌다. 그사이 독자들의 질책을 꽤 들었다. “<한겨레>가 편향적인 기사를 쓴다. 인권 보호 차원에서 좋은 의도이지만, 부작용도 충분히 고려해 신중히 다뤄야 한다.” 이렇게 차분하게 짚어주신 분도 있고, 화가 많이 나 전화를 주신 독자도 있다. “치안도 나빠지고 ‘가짜 난민’도 많은데 <한겨레>가 난민을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가짜뉴스’를 양산한다. 언젠가 큰코다친다.” 다소 곤혹스러운 비판도 있다. “대다수 국민은 난민이 들어오는 걸 반대한다. 여론을 무시하고 난민들 불쌍하다는 일방적인 기사를 쓰는 건 국민 기만이다.” 여론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 이를 정확히 전달할 의무가 있는 언론의 처지에서 이런 지적은 표현 자체만으로도 아프다. 그에 더해 “실정도 모르면서 책상머리에서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타박이라도 듣게 되면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대체로 언론은 사회적 소수자 문제를 다룰 때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자세 잡기가 쉽지 않다. 생각해보면 독자들의 우려가 이상할 건 없다. 우린 평생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데 익숙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인도주의적’이고 ‘인류 보편적 가치’ 등의 막연한 언어로 ‘이젠 받아들이라’고 하면 사실 불편하다. 나는 준비돼 있느냐고 자신에게 물어봐도 그렇다. 곤란한 처지에 몰린 낯선 이가 찾아와 방 한 칸 내어달라고 하면 나는 기꺼이 그럴 수 있을까. 마지못해 식사 한번 하고 소액을 기부하듯 건넨 뒤, ‘그래도 나는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했다’며 만족하는 속물은 아닐까. 솔직히,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내심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정부가 나서주길 바랐던 것 같다. 이토록 어려운 문제를 정부가 현명하고 품위 있게 헤쳐나갔으면 했다. 불과 60~70년 전 비슷한 처지를 겪었던, 그래서 상대를 잘 이해하는 꽤 괜찮은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지난 29일 법무부가 발표한 대책은 실망스러웠다. 난민 이슈가 본격화한 지 한달이나 지난 시점이다. 난민 추가 입국을 틀어막고, ‘난민 제주 고립’도 부족했던지, 법무부의 관심은 온통 “국민의 우려”만 “무겁게 받아들이는” 데 쏠려 있었다. 난민 심사 기간을 앞당기려 직원 6명을 추가 투입하는 것 외엔 엄포뿐이었다. “테러, 강력범죄 등 문제 소지를 꼼꼼히 심사하고”, “난민제도 악용 사례를 방지”하며 “남용적 신청자는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했다. “난민인정자 교육을 강화해 우리의 가치와 문화 등을 준수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대목에선 얼굴이 화끈거렸다. ‘준수’와 ‘교육’이 있을 뿐 ‘배려’와 ‘이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가 바뀐 뒤 인권에 관심이 많다던 진보 성향의 교수와 변호사가 장관과 고위 간부로 법무부에 대거 들어간 게 아니었나? “우리를 찾아온 난민을 문전박대하면 무슨 낯으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나? 그런 편협하고 이기적인 자세로 앞으로 남북의 평화와 화합을 만들어갈 수 있겠는가?”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가 지난 주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정부가 남북관계를 풀어 나가듯 우리에게 다가온 낯선 ‘시험’도 잘 치러냈으면 한다. 정부만 잘한다고 풀릴 일은 아니지만, 정부라도 잘해야 시나브로 변화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soulfat@hani.co.kr
이슈우리 안의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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