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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네오라이트’의 귀환

등록 2018-07-05 18:15수정 2018-07-06 12:25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아량이다. 즉,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 철회의 핑계는 다양한데, 가장 흔한 게 ‘안전’이다. 내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하는 순간 강자와 약자의 구조적 권력관계는 흐려지고, 때로 강자가 피해자로 변하는 마술적 변성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것이다.
박권일
사회비평가

1천명 가까운 시민들이 “가짜 난민”을 추방하라며 촛불을 들었다. 예멘 난민을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 수가 61만명을 넘었다(7월5일 기준). 국민주권론의 외피를 두른 인종주의 담론이 끓어넘치고 있다. 거대한 배타주의 집단의 출현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징후는 또렷했고 논리는 완성되어 있었다.

9년 전, ‘다문화정책 반대 카페’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담론을 분석한 적이 있다. ‘반(反)다문화주의’를 표방한 그곳은 외국인 노동자, 특히 이슬람권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노골적으로 분출되던 공간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이라는 전통적인 이념 대립을 낡아빠진 것으로 치부했다. 중요하고 심각한 진실은 따로 있었다.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 모두 다문화주의로 한통속이라는 것. 과거 가장 위협적인 적은 북한과 ‘빨갱이’였지만 현재 가장 치명적인 적은 외국인 노동자, 무슬림이라는 것. 국가의 급선무는 수상한 타자의 침입을 철저히 통제해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것.

몇 년 뒤 등장한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와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국가정보원의 여론조작 수단이기도 했던 일베가 소위 민주화 세력을 주된 타격 대상으로 삼은 반면, 다문화정책 반대 카페는 민주화 세력뿐 아니라 산업화 세력도 일관되게 비판했다. 전라도 혐오나 여성 혐오 발언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내부에서 제지되거나 순화되었다. “여러분,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당시 나는 이 흐름을 전통적 우파도 아니고, 뉴라이트류도 아닌 새로운 우파의 출현이라고 생각해서 ‘네오라이트’(Neo-Right)라 명명했다.(<우파의 불만>(2012) 참고)

이번 사태는 노골적 인종주의가 주류 담론으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20년 가까이 이어져온 다문화주의 캠페인의 실패를 상징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표면상 인종주의의 대립물이었지만 위선적인 관제 이념이란 인식을 끝내 넘지 못했다. 반면, 반다문화주의 담론은 정부가 숨기고 있는 ‘진짜 현실’을 폭로하는 대항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결과적으로 다문화주의가 인종주의의 숙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당연한 귀결이다. 다문화주의는 평등과 연대를 목표 삼는 게 아니라 타자를 그저 참고 견디도록 가르친다. 그 핵심 요소는 ‘관용’(tolerance)이다.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아량이다. 즉,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 철회의 핑계는 다양한데, 가장 흔한 게 ‘안전’이다. 내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하는 순간 강자와 약자의 구조적 권력관계는 흐려지고, 때로 강자가 피해자로 변하는 마술적 변성이 일어난다.

실제로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난민 500여명에게 시민권도 아니고 단지 입국을 허가한 정도로 “특혜”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라. 자신의 안온한 특권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살아오다 자그마한 여성차별 시정조치에 “역차별”이라며 ‘천하제일 피해자 대회’를 열던 어떤 남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자본이 위기를 기회로 삼을 때마다 삶은 기회를 잃고 위기로 내몰렸다. 기존 정치가 위기를 해결하기는커녕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한다고 판단한 대중은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해명해줄 논리를 재구성하게 된다. 물론 위기를 만들고 심화시킨 건 초국적 자본, 재벌, 관료, 정치가 등 자본-권력 시스템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다. 게다가 오늘날 많은 이에게 글로벌 엘리트들은 적대의 대상이 아니라 선망과 동일시의 대상이다. 저항의 동기조차 형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이주노동자·이슬람 난민 혐오 같은 배타주의는 쉽고 명쾌한 ‘해결책’이다. 위기를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즉각적이며 강한 효능감을 줄 수 있기에 그 ‘해결책’은 빠르게 수용되고 확산되었다.

평등과 연대가 강한 사회에서는 차별과 억압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역으로 차별과 억압이 강해졌다는 것은 평등과 연대를 추구하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이다. 다문화주의라는 자유주의 기획의 앙상한 거죽을 걷어내고 나면, 결국 우리는 진정한 과제를 직시하게 된다. 적대를 정확히 파악하고 투쟁의 무기를 제공할 수 있는 좌파-평등주의적 기획의 필요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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