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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맛있는’ 저녁이 있는 삶 / 황보연

등록 2018-07-15 20:48수정 2018-07-16 13:32

황보연
정책금융팀장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에만 해도 근로시간은 노동자의 생활리듬에 맞춰져왔다. 하지만 공장에 기계가 들어오자 사정은 달라졌다. 비싼 돈을 들여 투자한 기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선 노동자가 그에 맞춰 일해야 했다. 교대제 근로나 야간근로와 같은 기형적 형태가 등장하며, 노동자들이 더 오랜 시간 일하게 된 배경이다. 이후로 근로시간 단축의 역사는 노동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는 장시간 노동 관행이 훨씬 더 공고하게 굳어져왔다. 초과근로를 해야만 생계비가 확보되는 임금체계, 비용부담을 줄이려는 기업과 임금을 올리려는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을 묵인해온 담합구조, 남성 외벌이 모델을 전제로 한 성별분업 등 구조적 문제가 얽혀 있는 탓이다. 이는 국내에서 근로시간 단축이 매우 느린 속도로 진전을 보여온 점과도 관련이 깊다. 2016년 기준 연간 근로시간은 2069시간에 이르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길다.

이런 맥락에서 이달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초과근로 금지’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종전까지는 주 40시간제가 법에 명문화됐음에도 행정해석으로 최대 68시간까지 근무가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휴일을 포함해 52시간을 넘길 수 없다. ‘실근로시간 단축’을 기대해봄직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산업 현장에서 실제 장시간 노동의 고리를 끊으려면 넘어야 할 관문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뜨거운 감자는 근로시간 감소에 따른 임금 손실 문제다. 지불능력이 충분한 대기업은 일찌감치 ‘근로시간 단축→노동생산성 향상→기존 소득수준 유지(혹은 상승)’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규모가 작은 기업이나 ‘생계형’으로 장시간 노동을 반복해온 이들에겐 해법 찾기가 간단치 않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장시간 노동자들은 대기업(14만9천명)보다는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80만6천명)에 쏠려 있다.

‘공짜 야근’으로 도마에 오른 ‘포괄임금제’의 운명도 기업별로 갈린다. 위메프는 최근 포괄임금제 폐지 한달 만에 초과근로가 44.4% 줄었고 초과근로수당은 직원 1명당 3배 넘게 올랐다고 밝혔다. 연봉의 20%나 되는 고정연장근로수당을 기본급에 산입한 영향이었다. 하지만 정부 지침이 늦어지는 사이, 다수 기업들은 폐지 자체를 망설인다.

이미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저녁이 있는 삶은 되겠지만 맛있는 저녁밥은 포기해야 하는가’ ‘대기업 직원만을 위한 법이 아니냐’는 탄식이 올라온다. <한겨레>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청소노동자는 “사업주가 이미 최저임금 인상을 핑계로 일감은 그대로 두고 근로시간만 줄여버렸다. 월급이 17만원이나 깍였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임금수준이 낮은 이들에겐 이 정도의 임금 손실도 타격이 적잖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연장근로 제한으로 정규직 월급 감소율은 10.5%이지만 비정규직은 17.3%(용역직은 22.1%)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한시적으로 재정을 풀어 임금보전을 해주고 근무시간 유연화 등을 독려할 방침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를 근절하고 이중 노동시장 구조를 개선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해, 격차사회를 해소하는 일이 병행돼야 한다. 소득 불평등도가 높을수록 장시간 노동 관행은 잘 바뀌지 않는다. 초과근로가 절실한 저임금 노동의 비중이 클수록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저항이 큰 탓이다. ‘맛있는’ 저녁이 있는 삶을 좀더 많은 이들이 누리기 위해 피해 갈 수 없는 과제다.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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