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당신이 휠체어를 타게 된다 가정해보라. 당장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데도 불편할 일투성이다. 여름에 서핑 가기는 틀렸고, 조기축구회에서는 탈퇴해야 하며, 직업을 얻기는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다른 측면도 말해보고 싶다. 방금 (비장애인인) 당신이 상상한 장면과 달리, 장애가 있는 사람의 몸은 그렇게 올곧은 신체로 고상하게 휠체어 위에 앉아 있지 않다. 많은 경우 선천적, 후천적인 질병과 장애로 인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의 대칭과 균형이 무너진다. 질병에 따라 근육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평균적인 키와 몸무게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장애인이 되는 일은 “못생겨지기” 쉬운 상태에 놓인다는 말이다. 물론 개인 차가 크다.(아름다운 당신은 예외다. 화내지 마시라.) 우리 시대의 절대다수가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다가가고 싶은 그 조형적 상태. 그 몸으로부터 장애는 당신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기 쉽다. 20세기 초까지 영국을 비롯해 서양 여러 나라에서 이른바 프릭쇼(freak show)가 유행했다. 유럽 백인들의 미에 대한 기준과는 한참 다른 아프리카에서 온 소수민족들, 인도에서 온 샴쌍둥이, 저신장 장애인 등 기이하고 ‘못생긴’ 사람들이 이 쇼의 등장인물이었다. 유럽인들, 미국인들은 이들의 모습을 돈을 지불하며 관찰하고는 자신들의 ‘정상성’과 아름다움에 안도했다. 1992년 영국에서 무용수 데이비드 툴이 춤을 추는 모습이 방송을 탔다. 양쪽 다리가 거의 없지만 튼튼한 양쪽 팔로 바닥에서 춤추는 그의 모습에 영국인들은 이제는 금기시된 ‘프릭쇼’를 떠올렸다. 그의 춤을 예술로 봐주기에는 너무 기이했고, 아름답지 않았다. 내가 그의 영상을 처음 본 날도 그랬다. 그의 움직임이 (나와 닮았다)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술적 아름다움보다는, 그냥 장애인으로서 자기 몸을 드러내고 춤추는 모습이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던 학교들에서 교육받았고, 삼겹살집 앞에서 출입을 거절당해도 전투적으로 맞섰지만, 휠체어 바닥으로 내려앉지 못했다. 20대 초반 사랑하던 사람 곁에 눕지 못해 앉은 채로 밤을 새웠다. 춤추고 연기하는 일이 좋았을 때도 양 어깨를 이용해 자유롭게 누빌 수 있는 바닥으로 내려앉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괴물’로 보일 것이라는 강박. 내 모든 움직임과 도전은 결국 ‘프릭쇼’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의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이 장애인이 된다고 가정해보라. 계단을 오르지 못한다는 문제는 장애인 인권운동가들이 열심히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프릭(괴물)이 아닌가? 어떤 직업을 수행하든, 시위 현장에 나와 어떤 메시지를 던지든, 삶을 어떤 태도로 대하든 우리는 평균 이상의 체중과 여드름 난 피부, 뒤틀린 팔다리를 가진 사람이 방송에 등장하면 그의 ‘프릭한’ 이미지를 조롱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만나게 된다. 무시해버릴 소수가 아니다. 이를테면 날씨를 분석하고 전달해줄 기상캐스터조차 왜 평균 이상의 체중이 나가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가. 모두 젊은 여성들임에도 임신한 여성의 모습은 왜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가. 전문성, 진정성, 새로운 예술적 시도, 그 모든 가치들이 한 사람의 외모 때문에 ‘프릭쇼’가 된다. 모든 인간은 그저 다를 뿐이며 아름다움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낭만적이다. 그럼에도 50대 여성 앵커, 항공기 승무원, 상처 입은 팔을 드러낸 기상캐스터가 일기예보를 전하는 사회인지 여부가, 당신이 장애인이 되었을 때 지하철역의 엘리베이터 수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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