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에 해당하는 표현이야 노르웨이어에도 있다. 한데 구미권 언어에서 ‘자존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체면은, 한국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위자의 저자세가 상위자의 ‘체면 유지’를 담보해야 하고, 상위자의 ‘체면’이 하위자의 자존감을 깡그리 밟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청산의 실패를 단순히 ‘과거 탓’으로 돌리기가 힘들다. 권위주의의 온존과 지속은 결국 현실적 권력집중과 비민주성을 반영할 뿐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노르웨이 총리와 달리 일반인과 신분이 다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현실적인 배경은 대통령이 쥐고 있는 엄청난 권력이다.
노르웨이에서 한국학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은 나 혼자다. 그렇다 보니 나한테 주변에서 자꾸 ‘한국문화 해석’(?) 요청들이 들어온다. 한국을 이런저런 사연으로 접하게 된 동료나 아는 사람들이 뭔가 이해 못 할 상황에 부딪히면 나에게 와서 묻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온 문의를 사례로 들겠다. 한 노르웨이 대학에 한국의 어떤 대학에서 시찰단이 찾아왔다. 시찰단이 머물고 간 뒤에 그 영접 의무를 맡은 교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나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학생들과 교수로 구성된 그 시찰단에서는 왜 모든 실무를 학생들이 다 도맡아 하고 교수는 부동자세로 앉아 별다른 표정 없이 설명을 듣고 학생들에게 명령만 그때그때 하는가? 영어를 더듬더듬하는 듯한 그 교수는 왜 학생들 앞에서 노르웨이 측과의 영어 대화를 거의 기피하는가? 왜 노르웨이 측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도 교수가 아닌 학생이나 조교들이 다 대신 맡는 것인가?
‘체면’에 해당하는 표현이야 노르웨이어에도 있다. 한데 구미권 언어에서 ‘자존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체면은, 한국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위자의 저자세가 상위자의 ‘체면 유지’를 담보해야 하고, 상위자의 ‘체면’이 하위자의 자존감을 깡그리 밟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자세로 ‘폼을 잡고 앉아 있는’ 상위자 주위에서 하위자들이 하인처럼 모든 일을 도맡아야 보스의 ‘체면’이 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직적인 노동분담은 당연히 어느 나라의 조직생활에나 다 있다.
북유럽이라 해도 교원과 직원, 학생이 맡아서 하는 일은 각각 다르다. 차이라면 한국의 ‘조직문화’에서는 상위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하위자들에게 떠넘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정하지도 못한 노동분담은 더 나아가서 인신지배와 같은 형태를 띤다. 학생들을 거느리고 국외 시찰에 나선 한국 ‘교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은, 농장주가 농노들을 데리고 다니는 광경이 아니냐고 의아해한다. 이렇게 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는가?
(내 학생들도 한국 신문 자료 등을 인터넷으로 보다가 가끔 나에게 그 문화적 맥락을 해석해달라고 질문하곤 한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이 어느 날 저녁 어느 곳의 한 호프집에서 시민들과 만났다’는 등의 뉴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대통령과 시민’이라는 어법부터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대통령도 결국 일개 시민이 아니냐고 나에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그를 뽑은 유권자들을 만나서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게 왜 뉴스거리가 되느냐는 것이 제일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노르웨이 같으면 총리나 장관 등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거나 어느 지역 내지 현장을 방문하여 주민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뉴스도 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 자리에서 모종의 특별한 발언이라도 나오면 그때 뉴스에 오를까 말까 한다. 한국에서 고위관료, 특히 대통령이 일반인과 ‘신분’이 다른 사람으로 간주되어 일반인과 평등하게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미 동아시아 역사를 어느 정도 배운 학생들은 이런 ‘민생투어’ 같은 관습이 고대와 중세의 군주 순행(巡幸) 의례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물론 일면에서 그렇기도 하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북한의 ‘현지지도’와 같은 정치적 행위의 패턴도 전통시대 군주의 순행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데 우리도 보통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시하는 이와 같은 일상 속의 권위의식·권위주의는 단순히 과거의 유습만은 아니다. 과거는 현재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긴 하지만, 과거의 결정력은 전혀 절대적이지 않다. 오늘날 왕족이나 내각 각료가 자전거를 당연하게 타고 다니는, 평등의식이 철저한 덴마크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는 귀족은 그 농노에게 체벌을 가하여 때려죽이는 경우까지 적지 않게 나타나곤 했다. 덴마크뿐만 아니라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모든 북유럽 국가는 불평등이 당연시됐던 봉건제라는 역사적 유산을 안고 있다. 그러니까 권위주의 청산에 있어서의 실패를 단순히 ‘과거 탓’으로 돌리기가 힘들 것이다.
권위주의의 온존과 지속은 결국 현실적 권력집중과 비민주성을 반영할 뿐이다. 한국 대통령이 노르웨이 총리와 달리 일반인과 신분이 다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현실적인 배경은 대통령이 쥐고 있는 엄청난 권력이다.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임금보다 오늘날 대통령의 권한이 어떤 면에서 더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중앙부처 장차관, 공공기관 기관장·감사 등)만 해도 3천~4천개 정도 된다. 국립박물관 관장까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광경을, 북유럽에서라면 아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공기관이지만 전문기관인 만큼 기관장 인사를 전문가들로 구성된 인사위원회가 처리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한데 한국에서는 전문성보다 ‘정치적 판단’, 즉 통치권자의 권력행사가 앞선다. 대통령이 직간접으로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검찰, 법원, 주요 방송국 등)까지 포함하면 1만개 이상 될 것이니 온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제왕적 권력이라 하겠다. 대통령 자리에 박근혜같이 무능하고 범죄성이 강한 사람이 들어가기만 하면 사실 상당 부분의 국가 기능이 거의 마비될 정도로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이 지나치다. 이와 같은 정도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과연 ‘시민’의 한명으로 간주하여 평등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
정규직 교수들의 권력 남용에 대해 최근에 이야기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학부생이라면 요즘 대학에서 차라리 ‘고객’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굳이 개별 교수에게 인신지배까지 받을 이유는 보통 그다지 없다. 한데 임시직 취직도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요즘 청년실업 보편화의 시대에는 학생들 간의 성적 경쟁이 치열할 때가 있고 북유럽과 달리 대부분 한국 대학은 상대평가를 실시한다. 동시에 북유럽과 달리 보통 익명평가와 같은, 평가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방식도 아니고 외부 시험관이 같이 채점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성적이라는 무기를 휘둘러 학생의 장차 취업 가능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갑’에게 학생들이 ‘깍듯이’ 대할 것은 충분히 예상된다. 그리고 학부생이 ‘고객’이라면 요즘 대학원생은 교수의 ‘노예’에 가깝다. 아마도 국내 갑을 관계 중에서 가장 심한 착취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다. 여기에서도 군사부일체 따위의 낡은 관념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민주성이 태부족한 이 사회의 현실이다.
권력은 현재 인류 문명의 필요악이다. 이상적으로 무권력, 무계급 사회로 이동했으면 좋겠지만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고 서열화시키는 권력이라는 독소는 불가피하게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책은 권력의 분산과 권력에 대한 민주적 견제다. 만약 노르웨이처럼 한국에서도 학과부터 대학 전체까지 학교의 각급 운영위원회나 이사회에 비정규직과 학생들의 대표도 참석한다면 ‘교수님’들의 권력을 어느 정도 견제하여 봉건 영주의 행진을 방불케 하는 국외 시찰들을 과거 이야기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대기업의 경영에 노동자 대표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면 천인공노할 각종 불법, 갑질들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치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사회의 민주화와 각종 사회적 관계들의 평등화다. ‘높으신 분’들의 군림이 없고 각자 직분은 달라도 ‘신분 차이’처럼 돼버린 경직된 위계성이 없는 나라야말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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