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팀 선임기자 점심 메뉴를 정하는 데도 ‘3 대 1’이면 한 사람이 대세를 따르지만, ‘2 대 1’이면 한 사람이 끝까지 싫다고 고집을 부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5당 원내대표들이 합의한 여야정 상설 협의체를 제대로 가동하려면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국회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다. 아쉬운 장면은 있다. 1990년 3당 합당 얘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 되려고 3당 합당을 했다. 15년쯤 뒤에 “내가 그때 합당 안 했으면 나도 디제이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원종 전 정무수석의 증언이다. 편리한 생각이다. 동의하기 어렵다. 1988년 4·26 총선 결과는 여소야대 4당 체제였다.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이었다. 의석 비율에 따라 야당에 상임위원장직을 배분했다. 이때의 ‘비례배분 원칙’은 이후에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의 기록이다. “나는 ‘집권당 일변도의 정치시대는 지나가고 여야 동반자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여야 협조체제가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부단히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내와 관용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런 기본자세를 갖지 않고서는 역사를 진전시킬 수 없다’고 마음을 정리했다.” 그런 사람이 1990년 1월 3당 합당을 했다. ‘우리나라 정치 풍토나 수준으로 보아 여소야대로는 정국을 이끌어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는 것이 이유였다. 구차한 핑계다. 3당 합당 이전 13대 국회 전반기는 의회정치의 황금기였다. 모든 법률과 예산안 심사가 4개 정당의 협상과 타협으로 이뤄졌다. 집권 여당의 날치기도 없었고 이를 막기 위한 야당의 국회 점거도 없었다. <김대중 자서전>의 기록이다. “여야는 국회 운영을 위해 자주 모였다.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타협이 최선이었다. 타협이란 결국 절충과 양보였으니 독주와 독선은 설 자리가 없었다.” “모든 법안이 여야의 합의로 처리되었기에 어느 때보다 만장일치가 많았다. 여야는 원활한 국회 운영을 위해 5자 회담을 자주 열었다. 여당에서는 대통령과 대표위원, 야당에서는 3당의 총재가 참석했다.”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의회정치의 황금기는 찬란하게 꽃피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정치 선진국으로 가는 디딤돌이 됐을 것이다. 노회찬 의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이 국회 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했다. 교섭단체는 국회 운영의 기본 단위다. 국회의장은 국회 의사일정의 대부분을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 또는 협의해야 한다. 상임위원회에서도 위원장이 모든 사안을 교섭단체 간사들과 의논해서 결정한다. 교섭단체가 아니면 국회에서는 거의 힘을 쓸 수 없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원회에서 빠진 것도 그런 이유다.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의 힘이 약해진 것은 그 자체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교섭단체가 네 개에서 세 개로 줄면 대화와 타협에 의한 정치가 더 힘들어진다.
연재성한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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