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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권력의 털갈이 / 김남일

등록 2018-09-04 18:12수정 2018-09-05 11:54

김남일
법조팀장

2008년 9월 대법원에서 열린 사법 60주년 기념식 자리에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행사장에 들어서자 경호를 이유로 휴대폰은 먹통이 됐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법원의 그릇된 판결을 사과하고 반성했지만 2005년 취임사에 견줘 힘이 떨어졌다.

그날 이 대통령 ‘축사’는 어떤 징후였다. 대법원장과 전국에서 모인 고위 법관들 앞에서 “사법 포퓰리즘은 경계해야 한다”, “국민 신뢰는 오직 정의와 양심의 소리에서 나온다”고 했다. 행사장을 나서면서 떨떠름한 표정의 법조인들과 “전과 14범한테 들을 소리는 아니다”, “서초동 온 김에 검찰 조사도 받는 거 아니냐”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한달 뒤 대검찰청에선 검찰 창설 6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법질서 확립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공안정국 조성이나 표적수사 운운하며 폄훼하는 일부 시각이 있다.” 징후를 해석하지 못했던 이들도 김경한 법무부 장관의 축사가 선전포고라는 건 눈치챘다. 이후 한국 사회는 정말 먹통이 됐다.

2009년 8월 경찰의 쌍용차 노조 파업 진압이 이명박 정부 청와대 최종 승인 아래 진행됐다는 진상조사 결과가 지난주 나왔다. 경찰의 잘못이 크고 크되, 검찰과 법원의 책임도 함께 묻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시가전을 방불케 하던 경찰 쌍용차 진압 작전 현장에 김경한 장관이 나타났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법무부 참모들을 거느린 그는 경찰과 악수하고 격려하고 위로했다. ‘경찰 작전 현장에 행정안전부 장관도 아니고 법무부 장관이 왜 갔느냐’고 따지듯 법무부에 물었다. “법질서 확립 주무장관으로 직접 둘러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겨레>는 다음날 ‘진압부대 사령관’이라는 제목을 달아 법무부 장관의 현장 방문 사실을 전했다. 대검 공안부는 곧바로 ‘용공성 짙은 외부세력이 쌍용차 노조 농성에 개입한 정황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 이튿날 나온 검찰 인사에서 노환균 대검 공안부장은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됐다. ‘우리의 노력을 신공안정국으로 폄훼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쌍용차 노동자 153명이 낸 해고무효 소송을 다시 ‘진압’한 것은 대법원이었다. 2014년 11월 대법원은 ‘해고 무효’ 판결한 원심을 깨고 “정리해고는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법률상 정리해고 요건’을 갖췄다며 일방적으로 회사 쪽 손을 들어줬다. 주심은 올해 1월 퇴임 뒤 최근 지역법관에 재임용됐다며 ‘평가’가 자자한 박보영 대법관이었다. 대법관 임명 직전 7년간 변호사 생활을 했던 그가 또 변호사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9년째 복직을 요구하고 있고, 박 전 대법관은 7개월 만에 ‘복직’했다.

정권 교체 뒤 그 사납던 경찰과 검찰, 법원이 먹통시대와 빠르게 단절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세 차례 정권이 바뀌며 쌓인 경험칙은 단절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쪽으로 작동한다.

표범 무늬는 가을이 되면 보기 아름다워진다 해서 좋은 의미로 ‘표변’이다. 이 가을, 권력기관의 변신이 진정 잘못을 인정하고 과오를 털어내는 ‘군자표변’인지, 잠시 표정만 바꿔 납작 엎드린 ‘소인면혁’인지는 알 길 없다. 다만 복면을 쓴 면혁, 반동을 기다리는 소인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권이 올라탄 표범의 털갈이가 성공했는지는 집권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무늬’는 차기 정권의 향배가 어렴풋이 드러나는 집권 중반 이후, 권력의 가을에 선명해지기 마련이다. 조만간 사법 7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내놓는지부터 지켜볼 일이다.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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