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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지진 / 임범

등록 2018-10-01 17:43수정 2018-10-02 09:26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지난 9월 초 홋카이도 지진 때 삿포로에 있었다. 새벽 세시에 호텔 22층 방에서 자다 깼다. 내진 설계가 잘된 덕인지, 전날 밤늦게까지 마신 술이 덜 깨서인지, 건물 흔들리는 느낌이 생각보단 덜 끔찍했다. 전화를 받은 호텔 프런트 여직원은 태연한 목소리로 “어스퀘이크”라고 말했다. 태연하게 말하라고 시키는 거겠지. 지진이 다시 올까 싶어 22층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와(정전으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호텔 로비에서 사태가 수습되길 기다렸지만 들어오는 정보들은 심각했다.

‘지하철, 철도, 공항 운행 중지, 고속도로 주요 구간 폐쇄….’ 낮 12시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가야 하는데 글렀네. ‘홋카이도의 주 전원인 화력발전소가 파괴돼 복구에 시일이 오래 걸릴 듯….’ 전기가 계속 안 들어온다? 휴대폰 전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거 떨어지면 대체 비행기가 언제 온다는 정보를 어떻게 듣지? 예보는 며칠 안에 큰 지진이 다시 올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공포스러운 느낌은 먹을 걸 사러 편의점에 갔을 때 왔다. 오전 8~9시였는데 생수와 김밥, 빵처럼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동이 났다. 냉장식품은 정전된 지 오래돼 상했을 수 있다며 안 팔려고 했다. 뜨거운 물을 구하기 힘들 걸 알면서도 컵라면 몇 개를 샀다.

호텔들은 신규 손님을 받지 않고 어제 묵은 방에 그대로 묵겠다는 손님만 받았다. 묵던 호텔 로비에서 충남 할머니들을 만났다. 단체관광 와서 이 호텔 19층에서 잤고 이날이 돌아가는 날이라고 했다. 할머니들은 표정이 밝았다. 이 와중에도 오손도손 모여 농담 섞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그걸 보며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들은 다시 19층에서 자기로 했다. 역시 씩씩했다. 22층에서 자기 정말 싫었던 나는 호텔을 나와 숙소, 식당 찾아 헤매다가 삿포로 한국 영사관에서 뜨거운 물 얻어 컵라면 먹고, 고등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로 갔다.

대피소는 뜻밖에 아늑했다. 밤 9시에 자려고 누웠을 때 나와 머리를 마주하고 누운 할머니들이 소곤소곤 떠드는 소리가 잠을 방해하기는커녕 자장가처럼 잠을 재촉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들과 인사하고 얘길 해보니 경상도 한 동네에서 단체관광 왔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활기가 내게 전염됐다. 그날 오후 늦게 신치토세 공항이 다음날부터 운항을 재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항공사별로 대체 항공기 출발시간을 알리는 문자를 고객들에게 보내왔다. 문자가 늦게 오거나, 대체 비행기 도착 시간이 늦은 항공사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그날 대피소의 한국인 열에 아홉은 한국 항공사들에 대한 선호도를 새로 정했을 거다.

그다음 날, 지진으로 사흘 동안 발이 묶인 한국인들을 태우고 갈 비행기가 낮부터 밤 11시 반까지 줄줄이 날아왔다. 신치토세 공항은 삿포로보다 강도 높은 여진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 강한 지진이 다시 올 가능성이 크다는 예보가 계속 나오던 상태였다. 내가 타고 갈 비행기는 밤 9시 출발로 끝에서 세번째였다. 저녁 7시쯤 탑승 수속을 밟을 때 공항 청사 바닥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다른 사람들도 느꼈을 텐데 아무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불안함을 감추고 서로 편한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나을 터. 속으로 생각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이륙하면 박수 한번 치자’라고.

비행기가 이륙했을 때, 몇몇 사람이 박수를 쳤는데 남들이 따라 치지 않아 썰렁하게 그쳤다. 나도 따라 치지 못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아직 비행기 두 편이 남아 있는데…, 홋카이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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