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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이상한 나라의 심재철 / 김태규

등록 2018-10-02 18:09수정 2018-10-03 15:49

김태규
정치팀 기자

수습기자 시절의 일이다. 교육 시간에 언론계 원로 선배가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혈관 속 피가 펄떡대던 나와 동기들은 “정의감”, “사명감”, “기자정신”이라고 대꾸했지만, 선배의 정답은 “호기심”이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빙 둘러서 웅성웅성하는데 그냥 지나치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야.” 호기심은 진실을 낳는다.

보고 싶은데 잘 보이지 않으면 호기심은 더욱 커진다. 대한민국 최고의 셀럽인 대통령이 생활하는 곳이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보안이 강조되는 청와대는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다. 심지어 청와대는 법관이 발부한 영장 집행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2012년 11월 이명박 대통령 일가의 내곡동 사저 터 매입 의혹을 수사하던 이광범 특별검사팀은 엠비 돈을 아껴주려고 나랏돈을 부당하게 당겨 간 청와대 경호처 압수수색에 실패했다. “군사상 비밀을 요하는 장소는 책임자의 승낙 없이는 압수수색을 할 수 없다”는 형사소송법 조항 탓이었다.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압수수색의) 승낙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단서 규정도 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이 국익을 침해하는지를 판단하는 주체도 수사 대상, 즉 ‘청와대’이기 때문이다. 2017년 2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하던 박영수 특검팀도 똑같은 이유로 청와대 수색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보안이 강조되고 겹겹의 보호를 받는 청와대가 뚫렸다. 국가 재정정보시스템에서 국정감사 자료를 챙겨보던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 보좌관들이 정당하게 발급받은 아이디로 접속해 청와대 직원들의 업무추진비 내역 등을 입수한 것이다. 국민 세금을 청와대와 정부 부처가 규정대로 쓰고 있는지 따지는 건 불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심 의원은 기획재정부 지침에 어긋난 업무추진비 지출을 지적하며 해명을 요구했다. “비정상적인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이뤄진 이면에는 북한 김정은과 우리 측 주사파들의 숨은 합의가 있다”는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주장보다 훨씬 합리적인 문제 제기다. 청와대와 정부는 심 의원의 의혹 제기에 “진실은 이렇다”고 일일이 설명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국가기밀 불법 탈취 사건”이라며 논란을 키우고 있다. 청와대에 납품하는 식자재 업체와 경호처 통신장비 공급업체 명단도 심 의원실이 빼냈다며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반국가 행위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심 의원은 청와대와 거래하는 업체 명단을 공개한 적이 없다. “서울시내에만 고정간첩이 수십만명”이라는 한 공안검사의 안보관처럼 세심한 우려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기밀 유출’이라면 이를 방지하지 못한 한국재정정보원의 잘못도 매우 크다. 하지만 이 정보를 입수한 심 의원만 국사범으로 몰고 있다.

시곗바늘을 2년 정도만 뒤로 돌려서 생각해보자.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재정정보시스템에서 청와대의 업무추진비 내역을 입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반국가 사범으로 몰아 엄벌하겠다’는 박근혜 청와대의 치도곤에 순순히 자료를 반납했다면 국민이 박수를 쳤을까.

정당한 호기심의 또 다른 말은 ‘알 권리’다. 호기심을 억압하면 진실의 순도는 옅어지고 어느 순간에는 말조차 못하게 된다. 2014년 11월 ‘정윤회가 비선으로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청와대 문건이 공개되자 박근혜 대통령은 “국기문란 행위”라며 대로했고 검찰은 신속하게 사건을 ‘정리’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검찰을 개처럼 부려 사람들의 호기심 구멍을 틀어막았다. 이상한 나라였다.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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