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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이수근과 조난자들 / 김영희

등록 2018-10-15 16:24수정 2018-10-15 19:02

1969년 5월1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이수근(맨 오른쪽)의 모습. 재판 직후 밝혔던 것과 달리 그가 항소를 포기한 것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1969년 5월1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이수근(맨 오른쪽)의 모습. 재판 직후 밝혔던 것과 달리 그가 항소를 포기한 것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전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 제3국으로 탈출하다가 베트남 사이공 공항 기내에서 격투 끝에 체포됐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1969년 2월13일, 당시 일간지엔 콧수염을 달고 안경을 끼고 가발을 쓴 그의 사진이 일제히 실렸다. “귀순의 탈을 쓴 ‘붉은 마수’ 극형에 처하라”는 기사부터 “36년 고이 지켜온 노처녀의 뜨거운 순정이 무참히도 짓밟혔다”며 그와 결혼했던 여성의 울분을 전한 기사까지 잇따랐다.

경악과 분노마저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1967년 3월22일, 김일성 수행기자였던 엘리트 출신이 판문점에서 유엔군 쪽 영국 준장 전용세단의 뒷자리에 올라타 북한군의 총탄 40발을 헤쳐가며 극적으로 넘어온 일은 남한의 체제 우위를 알릴 호재였다. 4월10일 서울을 시작으로 진주, 부산, 대구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대한어머니회는 북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구해달라고 유엔 등에 호소문을 보내고, 100만명 범세계 서명 운동도 벌어졌다. 이수근의 인생은 그해 김수용 감독, 박노식·남정임 주연 영화 <고발>로도 만들어졌다.

김신조 사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등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던 당시, 중정에 특채까지 됐던 그의 탈출 기도는 정권의 악재가 될 터였지만 “위장귀순과 배신에 대한 규탄으로 모아진 언론 보도 속에 위기가 선전의 호기로 반전”(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됐다. 분단체제 강화의 서막이었다. 1989년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가 꼼꼼한 취재를 통해 중정의 조작 의혹을 밝히기 전까지 그는 수십년간 ‘위장간첩의 대명사’였다. “대머리 훌렁 까진 이수근, 새까만 안경과 코밑에 가짜 수염 달고서 홍콩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 멋지게 꼬리 잡혔네.” 70년대엔 남진의 노래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를 개사한 ‘이수근의 노래’가 아이들 사이에 번졌다.

1967년 4월1일 기자회견에서 이수근은 “북한에는 ‘사색의 자유’마저 없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나중엔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한이 바로 지옥이다. 그래서 탈출했는데 남쪽도 틀렸다. 자유도 없고, 독재이고 해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다”고 말했다. 탈북민 출신 주승현 박사는 <조난자들>에서 “분단 현실에서 자신은 이용당하거나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이수근을 ‘한반도의 조난자’라 불렀다. 분단체제가 해빙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지금, 사형 집행 49년 만에 이수근의 무죄가 지난주 재심을 통해 법원에서 확정됐다.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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