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1%%] 김원영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어린 시절 어른들은 “네가 감당할 만한 사람이기에 신께서 장애를 준 것이란다”고 내게 설명하곤 했다. 아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나는 물었다. “왜 하필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나를 태어나게 한 걸까요?”, “설마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감당할 만해서인가요?”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는 내게 기독교를 비롯해 각종 “~교” 신자들이 종종 친절한 얼굴로 말을 건다.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보세요.” 다양한 뉴에이지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내게 다가와 속삭인다. “삶은 계획되어 있는 거예요.” 그들의 의도가 선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시도 때도 없거나 전술이 치사할 때는 난감하다. 대학 시절에는 관심을 표한다는 쪽지를 받았다. 떨리는 마음에 연락했더니 결국 종교 모임에 나오라는 이야기였다. 신에게 헌팅을 당한 셈이다.

때로는 의도조차 불분명하거나 악하다. 시골에 살던 어린 시절 할머니의 요청으로 한 무속인이 우리 집 마당에서 굿을 했다. 그는 집 아래 거대한 바위가 있다며 그 바위를 집이 누르고 있으므로 내 다리가 이 집에 눌려 있는 형상이라고 지적해줬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논리라도 찝찝함이 남은 아버지는 그 바위를 파버릴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 뿌리를 찾기 어려웠다. 아마 그 바위는 ‘지구’였던 것 같다. 장애인 가족은 지구 밖으로 나가라는 소리로 들렸다.

우리는 거대한 서사(이야기)에 운명을 맡기거나 그것으로 생(生)을 설명하기 원한다. 개인의 삶도 한 공동체의 역사도 일종의 서사 쓰기다. 서사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상상된 공동체(국가)의 필수조건이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시민들을 향해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라고 외쳤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한국어를 쓰는 호모사피엔스이지 딱히 우수할 이유가 없지만, 그의 말은 외세의 오랜 침략과 분단이라는 공통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한 시도였다. 연약한 사람들, 아프고 약해서 얻어맞고 찢긴 개인과 공동체는 특히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연약하다는 말이 그저 힘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살며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을 만든 장혜영 감독은 동명의 책에서 그렇게 썼다. 정말 연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은 거대 서사나 운명의 주재자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시간을 짧은 순간들로 나누고, 그 속에 섬세하게 조정된 일상을 구축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삶이다. 이를테면, 발달장애인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신의 사랑이나 민족해방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맞지 않고 자기의 욕구를 적절히 전달할 수 있는 잘 설계된 하루다.

신앙과 민족해방의 서사가 사라진 자리를 우리는 ‘인권’이라는 또 다른 서사로 채웠다. 여러 곳에서 인권교육이 시행되며 나도 자주 강사로 나선다. 서울인강학교에서 발달장애 학생을 폭행하고는 “100번 말하면 알아들어. 근데 100번 말하는 것보다 때리면 말 들어. 미친놈들이라서…”라고 말하는 사회복무요원(공익근무요원)도 인권교육을 여러차례 수강했을 것이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하루하루를 각자의 방법으로 지켜나가는 연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100번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100번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장 감독의 말처럼 아프고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날에도 한여름을 대비해 모기장을 주문해야 할 때, 이를 돕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연약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만들어온, 바로 이곳에서의 하루를 지켜내는 작은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