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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병 안의 거위 / 고명섭

등록 2018-10-21 16:49수정 2018-10-21 19:04

지난 7일 네번째로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위터 갈무리
지난 7일 네번째로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위터 갈무리
‘공안’(公案)이란 선불교에서 스승이 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려고 제시하는 역설적인 물음이나 문구를 말한다. 가령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조주 선사의 대답이 대표적인 공안이다. 불교의 근본 원리를 이 세상 너머 특별한 곳에서 찾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조주의 스승은 남전 보원(748~834)이다. 이 선사에게 따라다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대부 벼슬을 하는 육긍이라는 사람이 남전을 찾아와 선사를 시험하려는 듯 묘한 질문을 던졌다. “옛날 어떤 사람이 큰 병 안에 거위 새끼 한 마리를 넣어 키웠습니다. 거위가 자라자 병목이 너무 좁아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거위가 죽게 생겼습니다. 자, 항아리를 깨서도 안 되고 거위를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면 스님께선 어떻게 그 거위를 꺼내시겠습니까?” 질문을 들은 남전이 손뼉을 세게 치면서 “대부!” 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대부는 놀라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전이 말했다. “거위는 벌써 나왔소.” 그 순간 육긍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선가의 수행자들은 공안을 붙들고 씨름한다. 하지만 분석적으로 따지거나 논리적으로 파고들어서는 답을 얻을 수 없다. 따지면 따질수록 질문에 사로잡혀 헤어날 길이 없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한순간에 전체를 보는 직관적 통찰이다. 미국 안에서 북-미 비핵화 협상에 계속 딴죽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북한 전문가라는 사람들, 행정부 내부의 대북 강경파들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회의론에 붙들려 끊임없이 그 의심을 정당화할 근거를 찾아다닌다. 이 사람들에게는 비핵화가 한 점 의혹도 없이 완료되지 않는 한 대북 제재 완화는 꿈도 꾸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래서는 불신의 병에 갇힌 거위 신세를 벗어날 길이 없다. 믿음에서 출발하지 않고는 협상은 성공할 수 없다. 북-미 정상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 “상호 신뢰 구축이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불신은 불신을 키운다. 끈끈이 종이에 달라붙은 파리처럼 불신이라는 전제에 매달리는 한, 병 밖으로 나온 거위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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