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주한 미국대사였던 필립 하비브는 본국에 당혹스러운 심정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첫 문장은 “한-미 관계는 평온한 적이 없었다”였다. 이 편지는 1970년대 초 미국이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려는 과정에서 나왔다. 박정희는 이를 안보 위기로 규정하고 1971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더니 1972년 북한과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편지는 박정희의 독자 행보에 대한 불편함을 담았다.
하비브는 이 편지에서 한-미 갈등 사례 셋을 들었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민정 이양을 거부하자 케네디가 원조를 끊겠다고 압박했던 일이 하나다.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미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한-미 갈등이 첨예화했다. 한국은 북을 강력히 응징해야 한다고 했지만, 미국은 미군 송환만을 위한 협상으로 제한했다.
하비브가 대표적 갈등 사례로 꼽은 건 1953년 이승만의 북진 통일 주장과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미국은 그즈음 이승만 제거 계획까지 세우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북방한계선(NLL)이란 것도 이승만이 북진을 주장하자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이 바다에 그은 군사분계선이었다. 당시 한국은 재정의 절반을 미국 원조에 의존했지만, 한-미는 끊임없이 갈등했다.(<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이후에도 갈등은 끊이질 않았다. 전두환 시절 디제이(DJ)를 사형시키려 하자 레이건 행정부가 한국을 압박해 미국 망명을 이끌어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클린턴이 영변을 폭격하려 하자 와이에스(YS)가 완강히 반대했다. 디제이·노무현 시절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와는 껄끄러울 때가 많았다. “반미면 어떠냐”고 했던 노무현이 등장하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노무현 시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9·19 공동성명 등 굵직굵직한 합의가 도출됐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미 동맹은 곡절이 많았지만, 큰 틀에서 순항했다. 70년 세월이 흐르면서 미국과 손잡은 남쪽 체제의 우월성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양국은 때로 갈등하면서도 대화를 통해 동맹을 조정해왔다. 이렇게 구축된 강력한 경제·군사 이익 공동체가 한-미 동맹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한-미 관계가 위험수위라는 등의 우려는 대부분 동맹의 이런 큰 맥락을 보지 못한 단견이다.
백기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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