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팀 기자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개발연대 당시 오랫동안 고교 교과서에 실렸던 안톤 슈나크의 산문에 “대의원 제씨의 연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국내 최고의 두 직업 경제전문가 집단으로 불리는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쪽의 최근 언설(발언·해명)을 보고 들으며 문득 떠오른 구절이다. 기재부 쪽은 2년 연속 20조원을 넘는 ‘초과 세수’가 논란이다. 국회예산정책처 국장을 지낸 조영철 고려대 초빙교수는 최근 어느 토론회에서 “2017년과 2018년 세입예산을 편성할 때 대규모 초과세수를 전망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세입전망을 낮게 잡은 건 대통령과 국회, 국민을 기만하고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차분하게 숙고하는 논객이 ‘기만’ 같은 다소 거친 어휘를 사용한데다, 한달 전 또다른 경제학 교수로부터도 “취약계층 복지와 일자리 지원 등 문재인 대통령의 ‘포용’ 쪽 선거공약 집행에 필요한 예산을 줄일 속셈으로 세입전망을 대폭 낮춰 잡은 게 분명하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이번 초과세수가 부른 ‘사실상의 긴축재정’은 사뭇 예사롭지 않다. 세입은 곧 지출을 제약하고, 예산은 금액으로 표현된 정부 정책이다. 과연, 예산편성의 커튼 뒤에서 모종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것일까? 섣불리 말하긴 어렵다. 바람이 낙엽을 떨어뜨린 건 분명한데 그 바람을 그릇에 담아 증거로 제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다만 문 대통령도 11월1일 내년 예산안 설명을 위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늘어난 국세 수입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며 포용국가를 위한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미흡했다고 질책했다. 해명에 나선 기재부는 다양한 경제변수들의 전망오차, 세입결손 재발을 막기 위한 안정적 편성 등 ‘불가피한 사유’를 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세입편성에서 논란이 이는 와중에 통화당국인 한국은행은 내년 세출편성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470조원짜리 내년 ‘슈퍼 예산’ 운용방향에 대해 “우리 경제의 생산성과 성장률을 올리는 부문에 주로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공개적으로 역설했다. 최저임금 인상 및 영세자영업자 카드수수료 인하, 사회안전망 확충 등과 관련되는 각종 ‘포용적’ 예산지출 항목이 “성장을 위해 써야 할” 내년 예산을 제약하고 있다고 우회적으로 문제삼은 셈이다. “경기부양 책임이 통화당국에만 과도하게 쏠리고 있다”는 그의 발언도, 한은의 권한 바깥인 재정정책을 ‘결례’를 무릅쓰고 언급하는 사정을 넘어 포용·분배에 맞춰진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을 직접 겨냥한 쓴소리로 들린다.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의 장래는 이를 억제하는 장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뿐만 아니라, 반대로 정당화하는 설파가 얼마나 위력을 발휘하는지에도 달려 있다. 막강한 권력 원천(재정·통화정책)을 갖고 경제 경로와 우리 삶을 지휘하는 두 전문가집단의 분주하고 요란한 ‘더 많은 성장’ 주창 앞에 우리는 묵묵히 듣고 압도당할 뿐이다. 정치적 음모 같은 건 제쳐두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건 고도의 과학적 지식·기술로 무장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집단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적 사유의 빈곤 혹은 결핍’이다. 우리 경제는 분배·포용이 활력과 전진의 ‘허파’로 등장해야 할 성숙단계에 와 있다. 아무리 경제를 깔끔하게 분석하는 고급 두뇌와 재능을 가졌다 해도 불평등이라는 주위의 고뇌와 맞서 싸우려는 야성적 혈기 같은 열정과 용기, 그리고 양극화를 교정하기 위한 정책적 지혜를 상실하고 있다면 경제전문가의 희소가치는 불신받고 추락할 수밖에 없다.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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