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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총장과 라부아지에 / 김우재

등록 2018-12-17 18:04수정 2018-12-17 21:15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화학은 18세기 유럽에서 근대과학의 대열에 합류했다. 화학혁명의 중심에 산소의 발견 과정이 있고, 그 핵심에 라부아지에가 위치한다.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과학사를 얕게 공부한 사람은, 흔히 라부아지에를 정치에 숙청당한 과학자로 포장한다. 간장종지 칼럼으로 유명한 보수 일간지의 한 필자도 그런 실수를 했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의해 직무정지가 요청된 카이스트 총장 사태를, 단두대에서 죽은 라부아지에와 비교한 것이다. 어색한 비유다.

라부아지에를 죽였다는 인물은, 자코뱅파의 지도자 중 하나인 장 폴 마라다. 가짜뉴스처럼 떠도는 이야기는 이렇다. 프랑스 학술원에서 거부당한 것에 원한을 품은 장 폴 마라가 혁명의 혼란한 틈을 타 라부아지에를 단두대에 세웠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마라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의사다. 그는 뉴턴의 <광학>에 대한 비판서까지 출간했지만, 번번이 프랑스 학술원에서 거절당했다. 하지만 마라는 여전히 데카르트주의에 머물러 있었고, 이미 뉴턴주의자로 채워진 프랑스 학술원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뉴턴주의라는 최신 학문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마라의 원한이 라부아지에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많다. 당시 프랑스 학술원장은 샤를이었고, 샤를은 프랑스 혁명 중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결정적으로, 마라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마라가 라부아지에를 민중의 적으로 표현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당시 세금징수원으로 악명이 자자했으며, 심지어 파리장벽을 세워 더 많은 세금을 걷자는 천박한 생각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는 민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민중의 분노가 그를 단두대에 세웠다. 프랑스 학술원의 다른 구성원들은 단두대에 서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은 과학을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은 귀족과 왕정을 목표로 했으며, 라부아지에는 그중에서도 악질이었다. 라부아지에가 단두대에 선 이유는, 그가 과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금징수원이자 민중의 분노를 자아낸 관료였기 때문이다.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로 죽지 않았다. 오로지 세금징수원으로 죽었다.

간장종지로 유명한 그 필자는 “과학자는 관찰과 실험결과만 믿는”다고 썼다. 그러고는 칼럼의 마지막 구절에서 “한국에서는 과학자들까지 숙청을 당한다. 이 블랙리스트도 언젠가는 단죄될 것이”라 했다. 카이스트 총장의 비위는 이미 감사를 받았고 이상징후가 발견돼, 과기부가 검찰에 고발조처한 사건이다. 새로 변경된 법규에 따라 과기부는 그의 직무정지를 요청했다. 이 과정엔 문제가 없다. 그의 비위는 검찰의 조사가 끝나면 밝혀질 것이다. 이 사태를 정치적 숙청으로 묘사하는 쪽이 ‘관찰과 실험결과만’ 믿는 것인지, 아니면 신중하게 조사결과를 기다리자는 쪽이 과학적 방법론을 존중하는 것인지는 자명하다.

한마디 보태고 싶다. 글의 논증을 지지하는 비유는, 적어도 논증의 방향과는 일치해야 한다. 라부아지에는 정치적으로 숙청당하지 않았다. 그러니 글에 라부아지에가 등장하면 꼴이 우스워진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모든 것에 면죄부를 주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대통령도 국정을 농단하면 처벌받는 세상에서 과학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면 누구나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지난 겨울 광장에서 우리는 그 소중한 교훈을 비싸게 주고 배웠다. 과학자가 예외가 되지 않는 세상이 더 아름답다. 과학자는 그런 세상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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