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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헤라클레이토스의 아궁이 / 고명섭

등록 2018-12-30 15:47수정 2018-12-30 19:26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너스 모레일서(1603~1634)가 그린 <울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너스 모레일서(1603~1634)가 그린 <울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는 소아시아 에페소스 사람이었다. 이 철인에게는 헤르모도로스라는 벗이 있었는데, 그 벗이 추방당하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에페소스 사람들은 모두 목매달아 죽어 마땅하다. 이 사람들은 에페소스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을 추방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못 오연한 사람이었다. 이 철학자는 <자연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는데, 대중이 함부로 재단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어렵게 썼다고 한다. 철학사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 책의 독자 중에 페르시아 왕 다레이오스도 있었다고 전한다. 다레이오스는 ‘에페소스의 현자’에게 정중히 편지를 써, 책의 내용을 강의해준다면 궁정의 호화로운 삶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다고 짧게 답했다. 오연함은 이 이야기에서도 묻어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무척 경건한 사람이기도 했다.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이 현자는 가문의 상속권을 모두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나중에는 도시의 소란을 피해 산속에 들어가 나물을 먹고 살았다. 그런 중에도 이름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 은둔자를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사람들이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나러 허름한 오두막까지 찾아왔다. 사람들이 본 것은 추운 겨울날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 불을 쬐고 있는 늙은 남자였다. 유명한 철학자가 이런 궁색한 모습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지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짓자 늙은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도 신이 임재해 있다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이 ‘성탄절 메시지’를 내면서 박노해 시인의 시 ‘그 겨울의 시’를 인용했다.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헤라클레이토스 시대로부터 500년 뒤에 세상에 온 예수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신이 임했다는 뜻이리라. 세밑 곤고한 사람들 곁에 세상의 온기가 깃들기를 바란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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