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옆지기(남편)가 처음 집을 직접 짓겠다고 했을 때 나는 반신반의했다. 엄두도 못 내는 나에게 옆지기가 말했다. “당신도 해본 적 없으면서 옷을 짓고 살잖아?” 옷은 짓다가 망치면 뜯어서 다시 박으면 되지만 집을 짓다가 망치면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때 내가 의지했던 건 먼저 손수 집을 짓고 사는 선배들의 단 한마디였다. “쩌그 새들도 즈그들 집은 즈그가 짓는데 사람이 지가 살 집을 지가 못 짓는당가?” 집터를 닦고 우리 밭을 고르면서 호미로 골라낸 돌을 채워 기초공사를 마쳤어도 남의 일만 같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옆지기가 처음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비뚤비뚤한 아궁이를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이 집은 죽을 때까지 못 팔겠구나 싶더라. 아랫집에서 모를 키우는 하우스에 해를 가릴까봐 마당을 양보하고 축대를 안으로 들여 쌓았더니 집 지을 흙은 아랫집 형님네 산에서 대주신단다. 어느 날인가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농을 하셨다. “아무래도 내가 그 집 입택주를 얻어묵고 죽긴 틀려부렀어.” “그라제, 두어 달이면 짓는 집을 2년째 짓고 있으니 내도 틀렸겄제?” “니는 안즉 젊응께 니까지는 얻어묵고 죽겄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무지 집이 될까 싶더니 흙부대를 쌓아 올린 벽이 다 올라가고 드디어 대들보를 올린다. 마을에 인사도 드릴 겸 상량식을 하기로 했다. 배합사료 없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돼지를 키우는 선배가 돼지를 잡아 주시겠다 했다. 통째로 잡아서 사등분한 돼지를 살을 발라 삶고 고사상에 올릴 돼지머리도 모양 나오게 삶아야 한다. 고기는 어찌어찌 해보겠는데 돼지머리를 모양 예쁘게 삶을 자신이 도저히 없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소식을 들은 마을 부녀회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가 다 해줄 텡께 걱정 말드라고. 떡은 떡집에 맞출 거제? 고사 지낼라믄 반드시 시루째 들고 와야 혀.” 언니라고 부르기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녀회 엄니들이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돼지를 손질하고, 마을회관을 지나던 마을 아재가 고기 삶을라믄 엄나무가 있어야겄네 하시더니 어디 가서 엄나무를 잘라 오신다. ‘내’ 집 짓는 일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이 일은 ‘마을 일’이 되었다. 이런 일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내가 이 일에서 주도적인 위치가 되긴 어렵다. 시골에 오고 나선 이런 일이 참 많다. 우리 벼농사도 우리가 정하질 못한다. 농약 안 치고 농사를 짓는다고 관행농 하는 분들에겐 영 부실해 보이는 논이 되니 소작을 부칠 논이 어떤 논인지부터 각 과정마다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선배들이 결정해줄 때가 많은 것.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기꺼이 도움을 주시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겸손이 절로 우러나기도 하지만, 내 집 일을 내가 주도하지 못하는 건 대단히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관계의 위계 속에 편입되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해서 시숙에 형님에 온 마을이 가족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에 대한 긴장감과 저항감도 만만찮다. 부녀회만 해도 40대부터 80대까지 그야말로 층층시하다. 하지만 생각한다. 인간이 ‘자립적인 삶’을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도시에 살 때 그렇다고 믿었던 건 단언컨대 착각이었다. 혼자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는 옆지기의 집짓기도 무수히 많은 사람과의 접속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짓는 일을 하고 살다 보면 세상엔 정말 신기하고도 놀라운 사람이 많구나 싶어진다. 무엇을 짓든 실수와 실패의 시행착오부터 마침내 성공한 사례까지 그 과정 하나하나를 사진까지 곁들여가며 나누는 사람들. 얼마 전 페친 문규민씨가 쓴 글에 무릎을 쳤다. “자립이란 의존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넘쳐흐를 때만 달성된다. 자유롭고 다양한 의존의 가능성, 그게 바로 우리가 그렇게 갈구하는 자립의 실체다.” 새해다. 그게 나라든 사회든 이웃이든,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비빌 언덕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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