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 최근 개봉한 피터 패럴리 감독의 영화 <그린북>(2018)은, 생활환경과 성격 등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자가 힘든 여정을 함께하면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이야기다. 천재 음악가라는 칭송을 받아가며 높은 교양 수준의 삶을 누려온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 분)는 흑인에게는 험난한 지역인 미국 남부 연주 여행을 떠나면서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라는 백인을 운전기사로 고용한다. 입담과 주먹만 믿고 뒷골목에서 살아온 토니는, 전기설비를 고쳐주러 온 흑인 기사들이 사용한 유리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완고한 인종주의자였다. 그가 일하던 술집이 문을 닫자 토니는 셜리에게 고용되어 그를 모시고 남부 여행을 떠나는 신세가 된다. 셜리 박사 또한 문화적 우월의식에 젖어 있다는 점에서는 토니와 공통점이 있다. 설 연휴에 이 영화를 선택한 건 왕자와 거지를 연상시키는 물구나무선 설정이 동화처럼 재미있게 다가와서였다. 토니는 급여의 절반을 선금으로 받고, 셜리 박사의 연주 여행이 차질을 빚지 않도록 모든 공연장에 그를 제시간에 모시고 가야 나머지 절반을 준다는 조건으로 고용된다. 이 과정에서 토니는 미국 남부에서 흑인이 활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셜리와 함께 절절하게 체험해간다. 노예해방이 선언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1962년이 배경인 영화이지만, 어떤 레스토랑과 호텔과 가게는 아직도 흑인을 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지역에서는 흑인에게만 야간통행금지가 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셜리 박사가 그 레스토랑의 디너쇼에 출연할 예정인데도 바로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인 ‘그린북’이란, 마치 이슬람교도들이 이슬람 문화권 이외의 지역을 여행할 때 이슬람의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으로 조리한 할랄 레스토랑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참고하는 가이드북처럼, 흑인이 미국 남부를 여행할 때 유색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식당과 호텔을 표시해둔 가이드북을 뜻한다.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토니는, 자신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긴 하지만, 흑인 셜리를 위해 소리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거나 공포탄을 쏘며 차별과 맞서는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인다. 반면에 셜리 박사는, 백악관 초청 연주회에 불려갈 정도로 정치적 배경도 든든한 인물이지만, 이 모든 차별을 그저 묵묵히 견뎌낸다. 이 싸움에 임하는 두 사람의 태도도 대조적이다. 이 과정에서 토니는 서서히 완고한 인종주의 편견을 내려놓고, 셜리는 완고한 문화적 우월의식을 내려놓는다. 우아함과 품위와 고전음악의 세계에 갇혀 있던 그가 흑인 재즈 바에서 흑인 밴드들의 연주에 맞춰 재즈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그런 변화를 상징한다. 영화에서는 문화와 배경이 서로 다른 인물들이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배우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1960년대에 흑인 보스와 백인 기사라는 설정, 두 주연배우의 열연에 힘입어 이 영화에서 이질적인 캐릭터가 서로 스며드는 모습이 유독 찰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든 자기 정체성의 완고한 성채를 허물고 나와 다른 정체성과 섞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의 창조는 거의 예외 없이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섞이면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해에는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고정관념과 완고함이 깨어지고, 더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즐겁게 뒤섞여 새로운 변종의 싹을 틔우는 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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