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지역이 중앙에게] 다문화 사회라는 거짓말 / 명인(命人)

등록 2019-03-04 17:57수정 2019-03-04 19:19

명인(命人)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다문화 사회라 한다. 작년 말 행정안전부가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 자료를 활용해 발표한 ‘2017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가 전라북도 인구보다 많다고 한다. 전체 약 186만명의 외국인 주민 가운데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결혼이민자나 귀화자가 아닌 이주민이 약 148만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60%가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살고 있다는데, 내가 살고 있는 전남에서도 외국인 주민은 어딜 가나 흔히 마주칠 수 있다. 시장에도 식당에도 농장에도 어장에도 외국인 주민이 있다. 그래서 다문화 사회일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2006년 ‘다문화가족지원법’에서부터일 거다. 그 법에 근거하여 다문화가족 지원정책이 수립되고 시행되었다. 그렇다면 다문화가족이란 무슨 뜻일까? 다문화가족지원법에 따르면 다문화가족이란 ‘결혼이민자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루어진 가족, 또는 국적법에 따라 인지 또는 귀화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자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말한다. 결국 ‘다문화 지원정책’이란 사실상 ‘다문화’ 지원이기보다 ‘가족지원’ 정책인 셈이다. 따라서 외국인 노동자나 외국 국적 동포는 지원정책의 대상이 아니다.

해마다 각 지역에선 이주배경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중언어 말하기 대회’가 열린다. 내가 살고 있는 전남도 고흥군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대회에 참여할 학생들의 대회 준비를 지도하는 교사들은 대체로 애를 먹는다. 대부분의 이주배경 학생들이 이 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이중언어 배우기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피부색이 좀 다르고 얼굴 생김새가 좀 달라도 한국어를 모어처럼 사용하는 이주배경 학생들에게 모어는 외려 외국어다. 게다가 이주배경 학생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구별되고 싶지 않다. 간신히 친구들과 친해지고 구별 없이 지내고 있는데 이주배경 학생들만 모여서 외국어(?)를 공부해야 하고 심지어 엄마나라 말이라며 드러내놓고 대회까지 나가야 하는 일은 그 자체로 ‘타자화’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인재를 키워야 한다느니, 다문화가 시대적 역량이라느니 떠들어봐야 이주배경 학생들은 엄마 나라, 엄마나라 말은커녕 엄마의 존재조차 지우고 싶은 것이다. 한편 지역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에서 결혼이민자 여성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엔 이 대회의 의미를 절박하게 느낀다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와 가족은 물론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까지 소외되고 있는 결혼이민자 여성들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 해마다 열리는 대회에서 누군가는 상을 타고 인터뷰도 하지만, 실제론 이런 현실이 다문화 ‘가족 지원’ 정책의 결과다.

이주민 중에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극소수인데 이 나라에 영어학원이 넘쳐나는 것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다문화 사회라면서 베트남어나 타이(태국)어, 네팔어나 우즈베키스탄어를 가르치는 학원은 눈 씻고 찾아도 찾기 어렵다.

다문화 사회란 한 국가나 사회 속에 말 그대로 다른 인종·민족·계급 등 여러 집단이 지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를 뜻한다. 하지만 정주민 대부분이 이주민의 언어를 배울 생각 따윈 없는데 어떻게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나? 정주민 대부분이 이주민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는데 어떻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나? 이러한 단일 언어, 단일 문화 사회에서 나이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타자화를 감수하면서 당당하게 모어를 배우나?

한국 국적을 취득한, 다시 말해 출신국이 어디든 현재 대한민국 국민에 한해서, 그것도 개인이 아니라 가족 단위에 대해 지원하는 정책이 현실에서는 이 지경인데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소외되어 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나?

다문화 사회? ‘다문화 가족’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상상력과 정책으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