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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버닝썬과 인공혈관, 주체 없는 권력의 도구들 / 이재훈

등록 2019-03-24 18:22수정 2019-03-25 08:53

이재훈
24시팀장

강남 클럽 ‘버닝썬’에서 시작된 폭행 사건이 연예인과 경찰의 유착 의혹으로 번졌다. 연예인들의 카톡방 친구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엘리트 경찰 간부와의 친분을 앞세워 불법촬영 피해 여성들의 고소와 클럽 불법운영 등을 무마했다는 의혹이다. 그렇게 10명에 이르는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가 법적으로 없던 일이 됐다.

사회는 그 사실에 분노하고 있는데, 정작 수사기관의 반응은 달랐다. 경찰은 이번 일 때문에 숙원 사업인 검경 수사권 조정이 물거품이 될까 애태운다. 검찰은 경찰의 곤란한 처지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경찰 총수는 국회에서 ‘김학의 별장 성접대’ 사건으로 맞불을 놨다. 검찰이 조직적으로 은폐한 의혹이 이는 사건이다. 두 수사기관의 알력은 각자의 조직 보위 논리를 선명히 드러낸다. 사건이 미칠 파장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두 수사기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경찰서를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을지 생각했다. 성추행 피해를 고발한 서지현 검사와 서울남부지검의 검사 성폭력 사건 무마 의혹을 폭로한 임은정 검사가 검찰 내부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을지 생각했다. 여성을 접대에 이용하는 연예인이나 여성의 피해를 두고 조직 보위만 고민하는 수사기관이나 여성을 하나의 도구로 멸시하는 건 마찬가지다.

수사기관만 그럴까. 지난달 영유아의 선천성 심장병 수술에 없어서는 안 될 인공혈관 재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인공혈관을 독점 생산하는 미국 의료업체 ‘고어’사의 메디컬 사업부가 2017년 4월 한국 시장 철수를 선언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2년 동안 의사와 환자 가족들이 고어사의 인공혈관 공급 재개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올해 초까지 손을 놓고 있었다. 심장 우심실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2살 보배는 그동안 깨끗한 피가 머리에 전달되지 않아 뇌 손상과 발달장애가 악화했다. 심장 판막이 온전히 형성되지 않은 3살 민규는 뇌로 가는 산소량이 적어져 온몸이 파랗게 되는 청색증을 앓고 있다.

사회는 이 사실에 가슴 치고 있는데, 정작 식약처 공무원의 반응은 달랐다. 이 문제를 고발한 <한겨레> 보도 직후 식약처 대변인은 의료기기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을 두고 식약처와 고어사가 “갈등한 적이 없는데 왜 ‘갈등’이라는 표현을 썼느냐”고 항의했다. 식약처는 같은 내용의 해명 자료를 냈다. 보도를 보고 이제라도 미국에 달려가 선천성 심장병 환아 5~6명의 인공혈관부터 받아 오겠다는 말을 기대했던 나의 바람은 부질없는 일이었을까. 식약처 공무원들 역시 환아의 고통보다 중요한 건 이번 파동이 조직에 끼칠 책임 총량이다.

앙드레 고르는 “관료는 국가의 권력을 보장하지만 스스로는 어떤 권력도 보유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했다. 관료는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규칙만 적용하고, 그 규칙들 뒤에 숨어 자신을 보호하면서 어떤 저항이든 무장해제시키며, 기관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매우 부분적인 실행자로서만 기능한다. 그들은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여성들과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환아들을 도구화했지만, 내가 보기에 주체 없는 권력의 도구로 사는 건 바로 그들이다. “인간이 더 이상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의 지위가 인간을 소유하는” 관료주의 사회에서, 뒤틀린 시스템은 고통받는 자들의 저항과 더불어 체제에 복무하는 인간 그 자체를 소외시킨다.

이 뒤틀린 시스템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21일 제17회 언론인권상 특별상을 받은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원청업체 서부발전 사람들이 와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인 아들의 죽음을 두고 “똥 밟았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그 주체 없는 권력의 도구들 앞에서 저항을 무장해제당하지 않았다. 김씨는 수상 소감에서 “나는 앞으로 기업살인 처벌법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아들을 잃은 고통을 딛고 스스로 ‘법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예외적 주체가 되는 삶. 뒤틀린 시스템을 푸는 답은 바로 이런 삶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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