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완
경제팀 데스크
종이와 물감으로 찍어내는 화폐, 즉 돈은 “너무나 중요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각국 통화정책 결정은 정치가나 다른 야욕을 가진 경제관료의 개입을 막기 위해 ‘자유재량’ 여지를 원천봉쇄하고 일정한 준칙을 따르도록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어왔다. 즉 중앙은행은 생래적으로 보수적이기 쉽다. 한국은행이 물가·금리·환율, 거시 국민계정, 미시 기업경영, 대외 수출입, 금융 부문에 걸쳐 방대한 조사분석체제를 완비하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임직원 2484명이 수집·분석하는 모든 경제 작동 데이터는 ‘돈의 수요·공급 최적 관리’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기반 자료다. 독점 발권력을 동원해 손쉽게 마련하는 지출예산(7896억원)도 ‘안정적 조사연구’를 위한 물적 기초다. 어느 한은 간부급 직원의 고뇌는 이 둘, ‘정치와 무관한 조직 생애’와 ‘유능한 경제분석 역량’(재능) 사이 어느 지점에 위치한다.
“저성장 기조에서 새로운 경제정책방향과 진로를 제시하는 보고서를 써보라고 위에서 지시를 내리는 일도 없고, ‘수요·소득 지향 정책 도입의 필요성’ 같은 제목의 보고서를 밑에서 써보겠다 해도 듣고 읽어보겠다는 의지가 수뇌부에 없다. 정치적 독립은 어느 정도 달성됐고 인적·조직적 기반도 막강한데 경제구조 변동에 대응·처방하는 보고서를 내놓지 못한 지 오래됐다. 금리를 조금 올리고 내리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다.” 찻잎을 우려낸 찬물에 더운밥을 말면서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꺼낸 말이다. 내부에서 소수의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성장의 방식·구조가 바뀌고 있는데도 여전히 중앙은행 경제철학이 공급(기업)에 몰두하고 더 적은 비용(노동) 투입 ‘구조조정’만 외치는 데 대한 짧은 탄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2%대 저성장(2011년 이후 실질성장률 3%대 3번, 2%대 5번)이 지속되고 있지만 ‘저성장’이란 단어를 한은 업무현황 보고에서도, 통화정책방향결정 성명서에서도, 정책연구보고서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저성장 ‘기조·진입·고착화’뿐 아니라 ‘우려’도 보고 듣기 어렵다. 지난 한해 보유 외화자산을 운용해 당기순이익 3조2천억원을 벌었다는 대목이 눈에 띌 뿐이다. ‘저’성장을 엄밀하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는 사정이 있고, “잠재성장률 주위에 근접한 성장”(한은)이라고 말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각종 경제지표는 우리 경제가 주기적으로 빈발하며 괴롭혀온 호황·불황의 경기순환보다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어떤 ‘저성장 추세’에 진입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약속은 깨지기 쉽고, 곧 실망이 돼 돌아올 공산이 크다.
1970년대 이래의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중앙은행 구실도 종말을 고하고 있다. 2013년부터 연 1%대 저물가 시대를 통과 중이고, 바깥 정치세력이 선거를 앞두고 화폐증발 압박을 가해 긴장을 일으키는 일도 외견상으론 없다. 중앙은행은 문득, 직업적으로 맞서 싸울 대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격이다. 한은 집행간부는 “한은은 물가안정이든 금융안정이든 ‘안정’을 추구하는 기관이다. 기획재정부처럼 무엇을 만들어 경제를 이쪽저쪽으로 끌고 가려는 조직이 아니다. 정책방향보고서 생산·배포는 괜한 정치적 해석·시비가 붙을 염려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조직이라는 볼멘소리다. 하지만 호소력 있는 고충이라고 하긴 어렵다. 정치라는 유령 뒤에 무력하게 숨는, 일종의 ‘독립성 함정’에 스스로 빠진 건 아닐까? 국책 산업연구원은 최근 부원장·연구본부장이 앞장서 ‘수출주도성장 한계 직면’ ‘소비성장구조로의 전환’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응용한 새로운 일자리 정책’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현존하고 명백한’ 경제 당면 과제들이다. 한은이 한국 경제의 운명을 짊어져야 할 소명을 가진 조직은 아니다. 하지만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개인·집단일수록 사회경제적 책임을 향한 열정은 무릇 더 높아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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