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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마로니에 8인’의 노숙 혹은 역습 / 안영춘

등록 2019-06-02 16:13수정 2019-06-02 19:48

1960년 작 <황야의 7인>(원제 ‘매그니피센트 7’)은 서부영화 올드팬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하다.(2016년 리메이크됐다.) 하지만 이른바 ‘장판’(장애인운동계)에서만큼은 ‘마로니에 8인’의 유명세에 미치지 못한다. 마로니에 8인은 실존인물들이다. 이들의 투쟁을 담은 <시설장애인의 역습>(2010)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총격 장면은 없다.)

2009년 6월4일 장애인 8명이 경기도 김포의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라는 집단수용시설을 떠나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한다. 석암은 한해 전 수용자 20여명과 직원 10여명, 시민사회의 연대투쟁 끝에 재단 책임자들이 비리로 형사처벌 받은 터였다. 그러니 이들 8인은 일껏 시설을 민주화해놓고 노숙인의 삶을 자처한 셈이다.

결심하는 데는 짧으면 30초, 길어야 1시간이 걸렸고, 결행하는 데는 열흘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싸워서 이겨보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집단수용과 민주주의, 시설과 인권은 결코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노숙은 목표가 아니었다. ‘탈시설’이라는 목표로 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설을 나와도 들어가 살 집이 없었다. 거리에서 한뎃잠 자며 한국 사회에 요구하는 도리밖에.

서울시청,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수도 없이 구호를 외쳤다. 서울시장은 피해 다니고 이들은 쫓아다녔다. 그렇게 마로니에공원에서 62일을 버텼다. 마침내 최장 7년간 거주할 수 있는 자립생활주택이 제공됐다. 활동지원인 연결을 비롯해 탈시설 지원을 위한 ‘장애인 전환 서비스’도 시작됐다. 그러고 10년이 흘렀다.

이제 마로니에 8인은 제가끔의 삶을 산다. 누구는 장애인자립센터 책임자나 활동가가 됐고, 누구는 야학 학생이 됐으며, 넷은 결혼도 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탈시설’이 보편적 가치가 된 것이다. 마로니에 8인의 싸움이 장애인 당사자 운동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4일, 마로니에 8인 노숙농성 1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시청 앞 등에서 열린다. 자축을 넘어, 10년 전의 ‘역습’을 되새기는 자리다. 장애인들이 보기에 탈시설 기반 확충은 더디기만 하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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