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29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06년 1월 초. 마당이 넉넉했던 염창동 당사였다. 한겨울 날씨가 매웠지만, 이날 최고위원회 분위기만 못했다.
박근혜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전투복’이라 불렸던 회색 바지정장 차림이었다. “당이 아무리 민주화됐다지만 말은 가려 해야 한다. 당 대표에게 존경심은 바라지도 않지만 막말은 삼가야 한다.” 말이 어찌나 차갑던지, 곱은 손으로 받아치기를 하던 기자에게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원희룡 의원을 겨냥한 것이었다. 지금은 무소속 제주지사지만, 당시는 재선 최고위원이었다. 그는 며칠 전 <한겨레21>에 “박 대표의 이념적 편견은 병이다. 편협한 국가 정체성과 이념에 비춰 자기 틀 안에 안 맞으면 전부 빨갱이로 본다”고 인터뷰한 터였다. 예산 국회를 제쳐둔 채 한창 사학법 반대 장외 투쟁 기치를 올리던 박 대표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것도 엄동설한에.
그날의 결론은 다소 싱거웠다. 정작 원 의원 자신은 지각한 터라 실시간 조리돌림을 피했고 회의 뒤 박 대표를 찾아가 사과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 뒤에도 그는 자신의 초재선 무리와 당 지도부를 화나게 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십년도 훨씬 넘어버린 이 장면이 떠오른 것은 7년여를 취재했던 정당을 이은 자유한국당을 보면서다. 황교안 대표는 3주 동안 전국 민생 장외 탐방을 했다. 주말엔 광화문 등지에서 태극기 부대와 함께했다. 반공과 혐오, 차별, 기독교 근본주의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반독재란 명분도 뜨악했지만, 이후 발언은 더했다. 긴 장외 투쟁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언론과 대중의 무관심인지라 더 자극적이 돼갔다. 결국 사달이 났다. “진짜 독재자 후예에게는 말 한마디 못 하니까 여기서 지금 대변인 짓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도 아차 싶었던지 ‘짓’ 발음은 갑자기 이지러진다.
경악할 만한 일들은 전에도 적잖았다.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은 북한군 침투설과 종북 좌파 폭동설을 부추기며 5·18 민주화운동을 붉게 덧칠했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징하게 해 처먹는다”고, 스스로 인두겁을 쓴 존재임을 부정한 글을 올린 차명진 전 의원 건도 있다.
수습해야 할 황교안-나경원 지도부는 우왕좌왕 내지 방관했다. 나 원내대표는 5·18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운운해 사태를 키우더니, 이를 민주화운동으로 처음 인정한 것은 자유한국당의 전신 정당이라고 했다. 자가당착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차 전 의원에겐 한 달 반이 지난 뒤 겨우 당원권 정지 3개월 처분이 내려졌다. 단속이 건성이다 보니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보다 못하다”는 말도 터져나왔다.
안타까운 것은 초재선 무리의 침묵이다. 당이 10%쯤의 지지율 상승과 중도, 합리성이라는 미래의 가능성을 맞바꾸며 극우로 치닫는 동안 누구도 ‘이건 아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회창-박근혜-이명박 시절을 거치며 미래연대-새정치수요모임-민본21로 이어져온 중도개혁파의 명맥은 끊어져 버렸다. 지도부에겐 등에 칼 꽂는 배신자 같은 존재였겠지만, 한나라당, 새누리당은 이들이 있어 유권자들에게 ‘먹잘 게 많은’ 보수 상차림을 내놓을 수 있었다. 온건 보수 지지자들은 이들에게 표 던질 이유를 찾았다. 당이 외통수 투쟁으로 치달을 때 회군 길을 틔워 놓은 것도 이들 몫이었다. 당은 17, 18대 대선과 18, 19대 총선에서 연거푸 승리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정치의 수준은 제1 야당의 수준이다. 총선에서 아무리 청와대의 엄격한 ‘진박 감별'을 통과해 배지를 달았다손 치더라도 탄핵이라는 `파천황'적 격변을 겪고도 정치적으로 조금도 진화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저 놀라운 일이다.
성연철
정치팀 기자
syc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