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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감세상] 통일, 익숙하면서도 낯선 / 주승현

등록 2019-06-26 17:50수정 2019-06-27 14:17

주승현
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

“통일을 바라지 않는 이 사회의 마지막 표류자.” 수년 전 글을 쓰는 친구가 내게 건넨 문구다. 이 글을 뒤로하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무의식적으로라도 통일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감사하다. 북쪽 출신이라는 신분으로 20대의 나이에 새롭게 살아가야 했던 분단사회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우정으로 다가오고 함께해준 남쪽 친구들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신촌 거리의 식당가에서, 섬마을 한글학교에서, 전방 군부대 면회소에서 천진난만했던 우리의 청춘에는 무의식중에 등장하는 출신지가 낯설 만큼 남북 간 경계선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내가 버릇처럼 꺼내 들곤 했던 화두가 있었는데, 그것은 통일에 대한 것이었다. 생래적인 탓도 있지만, 이곳에서 새로이 해석되는 통일에 대한 의미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진부하고 진지한 소재에 싫증이 나듯 누군가 대화의 흐름을 일상의 주제와 소소한 기호들로 바꾸어 놓으면 의기소침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신산한 삶의 현장에서 만남 그 자체가 위로가 되었던 친구들에게 그 편중된 주제가 얼마나 지리했을지 이해가 된다. 그것을 여태 담아두고 기억해준 친구가 있어 고맙고 더 미안하다.

북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와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를 들으며 성장한다. 어릴 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는 포스터에 적힌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였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남북한은 원래 한민족이고 남쪽 지역은 미군이 일시적으로 강점하긴 했지만 결국 그들을 몰아내고 통일이 될 텐데, 굳이 “조선은 하나다”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였는데도 통일의 당위가 머릿속에 깊게 내재해 있었던 것 같다. 비무장지대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걷어낼 수 있는 철책선으로 보였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지금도 ‘휴전선’보다는 ‘38도선’이라는 용어에 더 익숙한지 모른다. 우리처럼 통일교육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태어나 죽을 때까지 통일에 대한 노래와 구호가 일상에서 발견된다. 아마도 의식조사를 하면 100% 가까이 ‘통일 찬성’으로 답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찬성이 누구에 의한 통일 추진인지도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북한 주도의 통일에 익숙한 제도와 환경에서 살아왔다.

통일에 대한 믿음과 열망에 익숙한 채로 남쪽에 왔지만, 이곳에서 마주친 통일 문제는 외려 부가적 요소에 가까웠다. 모호하고 성의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논리들을 알아가다보니, 더는 한국에서 통일이 당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물질적 풍요와 안정된 삶이 나와 모두의 간절한 소원이 된 지금, 민족의 소원이었던 통일이라는 목표는 힘을 잃었다. 얼마 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설문조사를 통해 ‘통일 문제와 경제 문제 중 하나를 골라서 해결해야 한다면?’이라고 물었더니, 국민 10명 중 8명꼴로 통일 대신 경제를 택했다고 한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통일은 숙명이었고, 한때는 금기였으며, 또다른 한때는 열망이었다. 이제는 숙명도 금기도 열망도 아닌 헛헛한 유물처럼 치부되는 통일을 보며 종종 정색하고 ‘우리의 소원이 정말 통일인가’라고 되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민족의 생존과 번영은 통일에서 확보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시대가 다시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미래에 도래하는 통일이 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의 교집합을 만들어가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한 지인이 북쪽에 있던 가족이 남으로 왔다고 집으로 초대했다. 하나원(통일부 산하 사회정착기관)에서 갓 퇴소한 북쪽 출신자도 여럿 와 있었는데 술도 마시지 않고 노래를 열창하는 그들의 흥도 낯설었지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에서 모두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그 광경의 생경함에 더 놀랐다. 남쪽 친구들도 나와 처음 나눴던 대화에서 그 같은 양가적 심정이었을까. 괜히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여느 때보다 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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