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 인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남쪽에서 온 청년 대학생 임수경을 티브이로 봤다. 이미 여러 북한 출신자들이 회고했듯 당시 주민들은 그가 입은 청바지와 티셔츠, 자유분방함이 신기했고 판문점의 분단선을 넘어서면서 체포되는 모습에 놀랐다. 어린 마음속에 그가 외친 ‘조국통일’의 구호가 깊게 박혔고 민족이 처한 분단 상황에 처음 눈을 떴다. 이후 북한에는 미증유의 대기근이 찾아왔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통일이 되면 우리도 더 이상 굶지 않을 텐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통일이 당위가 아닌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되었지만, 그 시절 그 희망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교 졸업 후 판문점이 보이는 비무장지대(DMZ)에 배치됐다. 고향에서 비무장지대까지 난생처음 겪는 먼 길을 떠났는데, 그것도 한반도 영토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현실이 분단 상황을 실감하게 했다. 비무장지대에는 ‘적정(敵情) 보고’라는 체계가 있었다. 적군의 상황이나 형편을 살피는 것이다. 비무장지대 내 한국군 전망대를 찾는 남쪽 관광객들도 보고 대상에 포함된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백명씩 발견되는 남한 관광객들을 보면서 남쪽 당국의 주민동원력이 북한보다 더 강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쫄지’는 않았지만 부럽기도 했다. 당시 현역병의 군복무는 13년이어서 남한 군복무의 6배 정도였다. 맞은편 초소의 한국군이 2년에 한번씩 바뀌는 것이 여러번 반복될 무렵 나는 분단선을 넘었다. 북한에서 봤던 청년 대학생 임수경이 국회의원이 됐다는 뉴스를 접하던 무렵엔, 나도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염색한 남한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회의원 임수경이 북한 출신 대학생에게 막말을 한 사건이 논란이 됐다. 그때 나는 남북의 분단선을 떠올렸다. 분단사의 질곡에 대한 기억은 비슷하더라도 분단으로 인한 응결과 굴절의 경험은 남북이 같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이 뉴스로 전해지고 정부가 보관한 막대한 양곡 처리 대안으로 가축 사료가 언급되는가 하면, 티브이를 통해 굶고 있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을 돕자고 호소하는 캠페인은 때때로 대기근 시절 북한 주민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졌다. 집에서 비무장지대 안의 전망대까지 차를 타고 가면 한시간도 안 걸린다. 전망대에 오르면 과거에 근무했던 북쪽 감시초소(GP)가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다. 한때 궁금했던 ‘남한 당국의 주민동원력’은 알고 보니 특별할 게 없었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전망대를 찾던 남한 관광객들은 누가 가라고 해서 동원된 이들이 아니었다. 그런 전망대가 휴전선 지역에만 13곳에 이른다. 전망대를 찾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가면 마주치던 어르신들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북녘땅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실향민들은 이제 떠나고 그들의 한만 남아 있는 듯싶다. 지금 시기에 남한과 북한의 주민들이 바라는 통일은 어떤 의미일까. 대학 신입생이 되어 상담을 청하는 이들 가운데는 실향민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도 있다. 북한에 대한 호기심 가득했던 학생들은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군대에 다녀왔노라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그들은 남한의 군대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남한의 군복무 기간이 점차 줄고 있는 것처럼 북한의 군복무도 13년에서 10년으로 단축됐다. 군복무 기간이 줄어든 만큼 분단 현실로 인한 아픔도 그만큼 극복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지금 북-러 국경지대에 와 있다. 북에서 살 때는 대륙과 닿아 있어서 ‘분단 섬’을 느끼지 못했다면 남쪽에서는 분주한 일상에 인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배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출발하는 순간 현재의 한반도는 섬나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와 접경한 광활한 대륙에서 바라보는 ‘분단 섬 한반도’가 숨 막히는 이유는 비단 폭염이 꺼지지 않는 7월의 계절 때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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