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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의길 칼럼] 한반도 ‘번국’에 대한 일본의 공포

등록 2019-07-29 17:10수정 2019-07-29 19:39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월 의식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일본열도에 내리꽂히는 칼날’이라는 한반도에 대한 공포와 동전의 양면이다.

대한 수출규제도 한국을 그 프리즘으로 바라본 거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월과 공포를 외교적 재료로 쓰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 지난 12일 일본 도쿄 경제산업성 별관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전찬수 무역안보과장(맨 오른쪽부터)과 한철희 동북아 통상과장이 일본 쪽 대표와 첫 실무회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 지난 12일 일본 도쿄 경제산업성 별관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전찬수 무역안보과장(맨 오른쪽부터)과 한철희 동북아 통상과장이 일본 쪽 대표와 첫 실무회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우월과 공포로 교직됐다. 양자관계 착종의 근본 원인이다.

중화 질서에 있던 한반도는 일본을 교화의 대상인 열등한 ‘인국’(隣國)으로 바라봤다. 반면, 중화 질서에서 비켜나 있던 일본은 천황 체제 속에서 한반도를 자신들의 ‘번국’(蕃國)으로 취급하려 했다. 이는 서로에 대한 공포의 외연이었다. 한반도에 일본은 수시로 침탈하는 세력이었고, 일본에 한반도는 대륙세력이 열도로 침략하는 통로였다.

백제·신라·가야는 쟁패 과정에서 왜와 연합하려 했고, 때론 그 무력을 이용했다. 이는 현대 국제정치학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에서 패권세력 형성을 저지하려는 일본의 세력균형 정책이다. 한반도에 통일된 패권세력이 등장하면, 그 여파가 일본열도에도 미친다고 우려했다.

당의 침공에 동맹인 백제가 패망하자, 왜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려 최대 4만2천명의 병력을 파견했던 백강구 전투가 대표적이다. 당의 개입으로 인한 신라의 삼국통일은 나당 연합의 일본 침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당 연합이 일본열도를 침공할 가능성에 전전긍긍한 왜는 서부 각지에 백제 망명 귀족들의 도움으로 조선식 산성을 쌓으며 방어책에 골몰했다.

삼국통일 뒤 나당전쟁이 벌어지자, 왜는 신라에 물자를 공여했다. 나당전쟁 격화로 일본열도 침공 가능성이 사라지자, 왜는 신라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한반도는 번국이라는 인식을 본격적으로 조성했다. 일본은 701년 ‘대보령’을 반포해 당은 인국, 신라는 번국이라고 규정했다. 신라 사신을 번국의 사신으로 대우했다. 신라는 당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이런 조처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에 고압적으로 나갔다.

중국과의 관계가 회복된 한반도의 통일왕조에 대한 공포로 일본은 8세기 중반 신라 침공을 준비했다. 당이 안녹산의 난에 시달리는 상황과 발해-신라의 불화를 이용하려다, 주동세력인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실각으로 포기됐다. 그 이후 한반도와 일본은 조선 초기까지 국가 차원의 외교관계가 단절되는 긴 시간을 보냈다.

일본에서 열도 전체를 장악하는 중앙정권이 부재했고, 허약한 막부 정권들은 공식 외교관계 단절로 한반도로부터 영향력을 차단했다. 이 기간 중 고려 때 여몽 연합의 일본 침공은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한반도에 대한 인식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대마도 정벌도 일본에 명-조선 연합의 침공 서곡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서로에 대한 양쪽의 인식 괴리를 심화했다. 일본은 규슈의 지방기관인 다자이후를 통해 한반도의 사신과 먼저 교섭하고 통제하는 외교 행태를 보였다. 일본 내지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공포의 발현이었으나, 외교적으로는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착각을 심화시키는 과정이었다.

한반도의 국왕은 기껏해야 막부 쇼군의 상대역이고, 천황은 그 위에 있다는 것이 일본의 인식이었다. 고려와 조선도 창궐하는 왜구나 임진왜란 같은 침탈에 시달렸기에, 왜구의 발진지인 쓰시마 등 일본 서남부의 번주들이나 막부 정권에 대처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고려 때 진봉 무역이나 조선 때 통신사 파견을 자신들에 대한 조공 무역이나 사신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일본의 우월 의식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일본열도에 내리꽂히는 칼날’이라는 한반도에 대한 공포와 동전의 양면이다. 한국전쟁을 보면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공포를 확인하며 한국을 우호 정권으로 안정화시키려는 것이 전후 대한반도 정책의 기본이었다. 한-일 기본조약이나 그 이후 한-일 경제협력은 우월과 공포의 산물이다. 최근 대한 수출규제 역시 한-일 관계의 현상변경을 요구하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한국을 우월과 공포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본 결과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동해에서 첫 합동 초계비행을 하고, 북한은 다시 미사일을 발사했다. 트럼프의 미국은 일본을 배려하지 않고, 북-미 관계 개선 등 대한반도 정책을 펼친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관계 악화는 일본이 더 견디기 힘들다. 우리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월과 공포를 이해하고, 외교적 재료로 쓰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이번 분쟁에서 한국이 열세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곧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가 열리고, 10월에는 일본 천황이 취임한다.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일본 내 진보·리버럴 세력을 배려하고, 한-일 관계 안정을 바라는 온건보수세력을 견인해야 한다. 원칙은 있되 유연한 외교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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