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실네트워크 사무총장 최근 벌어진 자율형사립고 폐지 관련 갈등을 보면서 우스갯소리 하나가 떠올랐다. 죽을힘 다해 정상에 오른 병사들에게 “이 산이 아닌가벼”라고 읊조린 나폴레옹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오해를 부르기 전에 미리 말하련다. 필자는 차별 없는 보편교육을 중시하며, 수준별로 나누지 않은 통합 학급 환경에서 훨씬 의미있는 교육 결과가 나온다고 믿는다. 또 그러한 사례를 실제 학교 선생님들과 만들고, 그 기법을 확산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자사고 폐지 관련 갈등이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큰 대가를 치르면서도 어떤 일을 추진하려 할 때는 그로 인해 해결되는 가치가 비용보다 컸을 때 의미를 갖는다. 폐지론의 핵심은 입시학원화된 자사고가 무한경쟁을 이끌고, 이로 인해 사교육이 심화되며, 과도한 학비로 소득에 따른 교육불평등이 발생한다는 점 등으로 요약될 것이다. 많은 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이 문제가 자사고 폐지로 해결될 일일까? 특정 대학 졸업장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어온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었다면, 같은 맥락에서 ‘개천 용 배출’을 교육정책의 핵심 목표로 삼고 ‘공정한’ 대입제도를 찾고자 대대적인 공론화 기획을 하고 대학을 압박해 수능으로의 회귀를 종용한 것은 정부였다. 21세기 핵심 역량과 전인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어느 순간 ‘그래도 공정한 건 수능’이라고 돌변하는 교육정책 속에서, 불안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입시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학교로 쏠린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대입을 교육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 통념과 정책이 근원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모든 갈등의 근원인 대학 간판이 성공 조건으로서 쓸모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흔히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며, 인공지능(AI)에 의한 직업 소멸 위협과 이에 대응할 교육 변화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지만, 이미 위기는 그보다 훨씬 빨리 눈앞에 와 있다. 대학 졸업장의 가치가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째 시그널은 놀랍게도 정부 영역에서 시작됐다. 이미 10년 전부터 준비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은 ‘스펙보다 능력’을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그 영향으로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 채용에 대학 졸업장을 내밀지 못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적용되고 있다. 민간 영역은 어떨까? 2017년 하반기 정보기술(IT) 기업 카카오에서는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했고, 지방대학 출신 지원자가 40% 넘게 채용되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경향은 대기업으로까지 이어진다. 올해 상반기 블라인드 채용을 선언한 대기업은 롯데, 씨제이, 현대, 신세계, 케이티 등이다. 이것은 한국만의 경향이 아니다. 지난 4월10일, 미국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애플·구글·넷플릭스는 더 이상 직원 채용에 4년제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지 않으며, 이것이 곧 기업 고용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취업을 위해 대학 간판에 목숨 걸지 말라는 경고신호를 세계 전역에서 명확하게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치열하고 공정한 경쟁을 뚫고 얻은 우수성의 상징, 대학 졸업장이 이렇게 무시되다니.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대학 간판이 회사에 필요한 능력의 수준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더 이상 기존 교육시스템의 인재에 대한 평가와 서열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신호이며, 실제 능력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평가를 하겠다는 의미다. 이것이 국가 교육정책이 대입정책의 블랙홀에 휘말려온 최근 2~3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사실상 이 위기는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예견됐으며, 교육이 어떤 능력을 길러주어야 하는지 근원적 물음을 던지며 답을 찾은 수많은 연구와 선행 사례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지난해 ‘미래 교육과 역량 2030’이라는 새로운 교육 관점을 발표하며 회원국의 교육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전국의 도전적인 공교육 교사들이 함께 시도하고 있는 ‘거꾸로교실’의 수업 혁신과 대학로의 실험학교 ‘거꾸로캠퍼스’는 새로운 교육적 목표가 기존 학교 시스템에서도 의외로 쉽고 효율적으로 실현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줬다. 이는 미래교육을 향한 비상구를 열어보고자 민간에서 시도하는 안간힘이다. 부디 대한민국 교육정책이 미래교육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절박한 주제에서 더 이상 실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언제까지 전국민이 헛된 산을 따라 오르며 허탈하게 진만 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