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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312호 법정에서 기록된 역사 / 현소은

등록 2019-09-03 17:49수정 2019-09-04 14:04

현소은
산업팀 기자

“우리는 억울하다.”

지난해 2월13일, 롯데그룹에선 곡소리가 나왔다. 1심 법원이 롯데타워 면세점 특혜를 바라고 박근혜 전 대통령 쪽에 70억원을 뇌물로 건넨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신동빈 회장을 법정구속(징역 2년6개월)한 뒤다. 예상 밖에도 롯데의 원망은 신 회장의 1심 재판부뿐 아니라 여드레 전 내려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심 재판부로도 향했다. 이 부회장 뇌물액수가 대폭 깎이며(89억원→36억원) 징역형의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불똥이 ‘엉뚱하게’ 신 회장에게 튀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 석방으로 ‘재벌 봐주기’ 판결이란 비판이 거세지면서 (신동빈) 회장님이 대타로 들어가신 것”이라는 게 롯데 쪽 호소였다. 애초 1월 말로 예정돼 있었던 선고가 삼성 2심 판결 뒤로 늦춰진 것도 ‘법원의 눈치작전’이라는 가설에 힘을 더하는 정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해 10월 2심에서 신 회장이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으로 풀려난 뒤에도, 롯데 관계자들 입에는 삼성 2심 판결이 자주 오르내렸다.

“우리도 가능하다.”

상황은 1년6개월 만에 바뀌었다. 이제는 삼성이 롯데 2심 판결을 호출한다. 지난달 29일 대법원이 이 부회장을 풀어준 2심 판결을 파기하면서다. 횡령액(86억원)이 집행유예 마지노선인 50억원을 훌쩍 넘기며 재수감 가능성이 높아지자, 신 회장 2심 판결이 ‘집행유예 명분’이 됐다. 삼성 쪽에선 “70억원 뇌물을 집행유예로 풀어준 판결대로라면, 뇌물액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이 부회장도 집행유예 판결 유지가 가능하다”는 취지로 말하고 있다. “삼성이 어떤 특혜를 취득하지도 않았음을 (대법원이) 인정했다”는 ‘정신승리’와 다름없는 주장까지 동원됐다.

물론 양쪽 주장 모두 사안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이 부회장 재판에서 ‘50억원’ 기준이 중요한 것은 비단 뇌물액수의 많고 적음 때문만이 아니다. 뇌물액과 연동되는 횡령액이 50억원을 넘어가면 징역 5년 이상의 실형에 처해질 수 있어, 3년 이하 징역·금고형에만 열려 있는 집행유예가 어려워진다. 물론 작량감경 등 갖은 법 기술을 동원하면 2심과 같은 집행유예가 불가능하지 않지만, 뇌물죄 인정 범위가 대폭 늘어난 만큼 현실성은 떨어진다. 롯데의 ‘대타 구속론’도 1·2심 법원이 일관되게 ‘70억원 뇌물’을 유죄로 봤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철없는 투정”(한 법조인)에 지나지 않는다.

“법원이 인정했다.”

두 재벌의 볼썽사나운 ‘장외여론전’이 본격화하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 강문경, 강완수)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작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리한 판단까지 앞세워 뇌물액을 깎아줬고, 형사8부(재판장 강승준, 김유진, 최한순)는 양형만을 이유로 한 상고가 금지되는 규정을 백분 활용해 신 회장이 재수감될 여지를 낮춰줬다. 애초 두 재벌에 이런 판을 만들어준 것은 명백히 법원이다. 무엇보다 두 재판부는 뇌물 500억원(삼성 433억원, 롯데 70억원)을 ‘재벌 총수가 대통령에게 겁박당한 사건’으로 뒤틀었다. 두 총수는 재판부가 쳐준 안온한 장막 속에서 서로를 곁눈질하고 모방하며 ‘피해자’로 자가증식했다. 최근 재계에서 숱하게 반복되는 ‘이재용 없는 삼성은 국가 경제의 위기’라는 공포 마케팅이나, 롯데가 대법원 판결을 즈음해 이틀에 한번꼴로 보도자료를 내며 상기시키는 ‘좋은 기업’ 프레임도 법원이 쥐여준 면죄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얘기다.

“롯데처럼만 하면 된다”는 삼성의 판결 가이드라인도, “우리는 삼성과 죄질이 다르다”는 롯데의 여유로운 표정도 모두 서울고법 312호 형사중법정에서 만들어졌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대통령 파면이라는 대하드라마에서 진정한 신 ‘스틸러’가 있다면, 두 재판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촛불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이들의 판결은 다른 재벌 총수의 입에서 비슷한 언어로 소환될지도 모른다.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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